2017. 4. 24. 00:29

- 다이켄을 위한 연성 주제 : : 널 보고 웃을 수 있을까?/가을날/눈물

- 짝사랑(http://bit.ly/1M6T88u)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읽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에 문제는 없습니다.

- 언제나의 그 내용.


 







 그래. 슬슬 이렇게 될 것이라고 켄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고, 어떠한 목표가 있으면 그것을 향해 똑바로 뛰어가는 녀석이다. 다이스케를 만나는 것을 그만두고, 전화를 하는 것도, 심지어 메일을 주고받는 것조차 그만둔 이후 자신은 어쩌면 이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기였다. 켄은 너무나도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옅은 쾌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안녕?”



 다이스케는 그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해온다. 그 나름대로 어색함을 지우기 위한 행동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연락을 받지 않는 내가 어색한 것인지, 그가 혼자서 했을 자책감으로 인한 거리감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모두 다일지도 모르지. 켄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척을 하고, 천천히 강변가로 걸음을 옮긴다. 자신의 뒤로 쫓아오는 다이스케의 발소리가 들렸다. 켄은 다이스케에게 보이지 않도록 숨을 몰아쉰다. 그래,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락을 받지 않는 나에게 초조해진 너가 찾아오는 이 순간을. 너를 마지막으로 만날 이 순간을.



많이, 바빴어?”


.”



 자신을 한 번, 흐르는 강물을 한 번 바라본 다이스케가 조심히 입을 연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연락을 못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고 있는 자신을 본 다이스케는 마침내 도달했을 것이다. 마음 속 저 편에 밀어두었던 불안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정말로 다이스케를 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다이스케는 이토록 조심스레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이겠지. 마치 네가 나를 동료로 끌어들이기 위해 찾아왔던 그 때처럼.


 걱정했었어. 미안해. 단조로운 대화가 딱딱하게 이어갈수록 켄은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를 만나면 흘러넘쳐버릴까 걱정했던 그 감정들이 오히려 메말라가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해오던 일이었다. 다이스케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고, 그 때야말로 자신은 그에게 끝을 고할 것이다. 자신은 더 이상 다이스케를 그저 우정으로만, 친구로만 대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다. 있어선 안 된다. 곁에 있으면 나는 계속 다이스케에게 욕정 해버릴 테니까. 자신의 더러운 욕망에 휘둘리는 다이스케를 더 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것조차 자신의 이기심임은 알고 있었다. 다이스케를 멋대로 좋아해놓고, 이제는 멋대로 떠나가려 하다니. 다이스케는 이런 나를 놓치려하지 않을 것이다. 다이스케는 밝은 아이였고, 그의 세계는 그에게 상냥했다. 다이스케였기 때문에 가능한 세계였다. 그런 그는 아마 이별에는 무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떠나가는 것을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포기할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가 자신에게 질려버렸으면 했다. 붙잡는 다이스케에게 자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가 자신을 혐오해버렸으면 했다. 자신에게 화를 내 주었으면 했고, 자신을 어처구니없는 이상한 아이로 기억했으면 했다. 내가 그를 떠나는 것이 아닌, 그가 자신에게서 떨어졌으면 했다. 켄은 몇 번이나 곱씹었던 수많은 문장들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를 더 상처 입힐 수 있는 말이 필요했다. 그가 자신을 더러워하고, 싫어하고, 다시는 다가오지 않을 말이 필요했다. 그런 이별을, 나는 웃으며 너에게 전하고 싶었다.



다이스케.”



 왜 내 연락을 받지 않았어?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그를 조용히 부른다. 노을이 내려앉은 강물을 보고 있던 다이스케가 움찔 어깨를 떨며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방금까지 했던 아무 의미 없는 대화는 이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어라 말을 하고 있던 다이스케가 벌어진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진다. 지금부터 할 말이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이유임을 알고 있는 듯 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것은 내 욕심이다더 이상 너의 흔적을 더듬으며 자신을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너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귀와 눈을 닫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너를 만나는 것조차 겁내며 도망 다니고 싶지 않았다. 너가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불안해하고, 기대하며 날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너를 마지막으로 볼 날을 기다리던 하루하루는 마치 지옥 같기도 했고, 천국 같기도 했다. 빨리 너를 떨쳐내고 싶었고, 미련하게 붙잡고 있고 싶었다. 모순된 감정을 가진 자신을 비웃으며 켄은 다이스케와 시선을 맞춘다.


 평소보다 진지해 보이는 눈이 노을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얼굴을 한 그는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있는 다이스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괜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를 더 찬찬히 바라볼 수 있도록, 기억 속에 각인할 수 있도록 시간이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이 정도의 억지는 부려도 괜찮다고 또 다시 이기심을 부렸다. 뒤에서부터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다이스케의 머리칼이 흔들린다. 내가 반했던, 좋아했던, 계속 곁에 있고 싶었던 그 얼굴을 하고 너는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어야만 하는데. 웃어야만 했는데.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처럼 노을에 젖은 붉은 강물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고 생각했지만 파도처럼 한 순간에 복받쳐온다. 이 상태로는 자신은 덤덤하게 그에게 이별을 고할 수 없었다. 아직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입 주위의 근육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널 보고 웃으면서, 세상에서 제일 싸늘한 말을 꺼내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이미 무너져 내린 둑은 흘러 넘치는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투둑, 하고 형태가 된 마음이 뺨을 타고 흐른다.



좋아해.”



 수 없이 머릿속에서 반복했던 이별은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Posted by 하리쿠
2017. 1. 16.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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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31. 04:34

천천히 잠에서 깨었을 때엔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시트와 이불이었지만 켄은 이 침대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조금 더 이불 속으로 넣으며 움직이자 엉덩이 쪽에서 아릿한 둔통이 올라온다. 찝찝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오늘 타카이시 군이 콘돔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타카이시 군은 행위가 끝난 후 뒷정리 같은 귀찮은 것을 해주지 않는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찝찝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잠에 들기 위해 뒤척이는데, 이치죠우지 군,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 꺼져있는 책상 쪽에서이다.



있었다면 인기척 정도는 내 줬으면 하는데.”


그 정도는 알아서 느끼라구.”



 자신이 이불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서야 책상 위에 놓여진 스탠드를 켠 타카이시 군이 자신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 했다. 자고 있는 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니 취미가 나쁘다. 자신이 일어난 것을 눈치 채고 나서도 인기척을 내지 않은 것도, 자신이 다시 잠이 들려 할 때 방해하듯이 이름을 부른 것도 일부러 였을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것이 그다워 켄은 잠자코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가 굳이 다시 자려는 자신을 부른 것은 자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질렸기 때문일 테니까. 천천히 침대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카이시 군이 그가 마시고 있던 컵을 자신에게로 내민다. 켄은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고, 그 컵을 받아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데운 우유였다. 이 또한 일부러 일 테다.



저녁 먹고 갈래? 편의점 음식이지만.”


먹고 싶지 않아.”



 아, 그래. 가볍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타카이시 군은 닫혀있는 방문을 연다. 단번에 쏟아진 거실의 불빛에 켄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에게 물어본 말은 아마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이인분의 음식을 데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먹겠다고 해도 가볍게 답을 하고는 그제부터야 무엇을 먹일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고, 아마 지금 같은 기분 나쁜 웃는 표정을 하고는 저녁을 먹는 자신을 압박하듯이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우유부터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일 테니까.


 켄은 먼저 나가버린 타케루를 바라보며 바닥을 향해 발을 내렸다. 깔끔하게 접혀져 있는 자신의 옷이 놓여있다. 방금 전까지 따듯한 이불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춥지는 않았지만 켄은 간단히 속옷과 바지만을 입고 방 밖으로 나선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다리로 방사통이 이어졌지만 이 또한 익숙한 통증 중 하나였다. 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손에 들려있던 컵을 내려놓는다. 당연하게도 한 입도 대지 않았다. 자신의 불편한 걸음을 감상하듯 탁자에 앉아있던 타카이시 군이 그 안으로 조금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날카로워진 시선을 받으며 켄은 다른 컵에다 냉장고에 있던 냉수를 따른다. 불쾌해 보이는 저 표정과 시선이 만족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벌써 저녁 시간대네. 자신이 타카이시 군의 집에 들어온 것은 분명 학교가 끝난 직후였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잤다고 생각하며 켄은 베란다의 문을 연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아직 덜 깬 자신을 깨워주는 것 같았다. 꽉 막혀 질식할 것 같이 무거운 집 안의 공기보다는 훨씬 낫다. 자신이 오래 자버린 것은 그가 무리를 시켜서 일 것이다. 자신을 미묘하게 불쾌하게 만드는 엉덩이 쪽의 통증도, 기운이 나지 않는 나른한 기분도, 순식간에 없어져버린 자신의 느긋한 저녁 시간이 사라져버린 이유도 모두 그였다. 불쾌한 기분이 올라온다. 그리고, 이 기분을 표출할 수 있는 상대는 자신의 앞에 있었다.



타카이시 군.”



 컵에 든 냉수를 모두 입 안으로 털어 넣은 켄이 타케루를 향해 몸을 완전히 돌리며 그를 부른다. 자신이 걸어가는 것도, 서늘함에 몸을 조금 떠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천천히 베란다로 보이는 아래를 바라보는 것도 마치 텔레비전 브라우관 속에서 펼쳐지는 쇼를 보는 것 같이 그저 방관자처럼 보고 있던 타카이시 군이 새삼 눈을 어린 아이처럼 뜨고 깜빡인다. 그는 자신이 그를 부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켄은 베란다의 난간에 편하게 몸을 기대어 섰다. 이 위치라면 밖에서는 자신이 완전하게 보일 것이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면, 그 마저도.


 저녁 시간이 되어간다는 것은 검도를 하기 위해 밖에 있던 이오리 군이 돌아온다는 소리다. 일을 하는 식구들을 위해 다른 집안보다 조금 저녁 식사를 일찍 시작하는 미야코 씨가 편의점의 다른 가족들을 부르려 나올지도 모른다. 히카리 씨는 저녁 식사 전에 미야코 씨의 편의점에서 그녀가 추천해 준 물을 사가곤 했었다. 그런 히카리 씨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이스케 또한 그녀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위해 미야코 씨의 편의점 앞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렇게 타카이시 군이 사는 멘션 앞을 지나가게 된 그들이 그다지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와 그가 키스라도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 좋은 타카이시 군은 어떻게 그 상황을 수습하려 애쓸까. 그 사람 좋은 타카이시 군이, 사실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보고 있는 외면의 타카이시 군은 사실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고, 제일 친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자신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평생 모른 채로 살아갈까.


 켄은 타케루를 향해 손짓한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한 제일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부르면 분명 타카이시 군은 자신의 의도를 바로 눈치 챌 것이다. 그와 자신은 정말 비슷한 면이 있어서, 서로의 생각 따윈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쪽의 목적이 그저 상대를 불쾌하게 하기 위한 종류의 것이면 더더욱. 그리고 상냥하고, 온화한 우리는 이런 것을 표출할 상대가 서로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심술을 받아주는 것처럼, 타카이시 군도 분명 모든 의도를 파악하고 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줄 것이다.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난 성격 나쁜 이치죠우지 군이 제일 좋아.”


나도.”



 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온 타카이시 군을 마치 연인처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켄의 의도에 넘치게 응하려 타케루는 그의 남색 머리칼을 휘어잡는다. 강제로 키스하는 듯이 켄의 고개를 억지로 꺾고, 입술을 잡아먹을 듯이 가득 삼킨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켄이 밖으로 떨어질 듯 몸을 휘청거렸다. 마치 이대로 떨어지고 싶은 듯 했다. 우연을 가장하여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은 듯도 했다. 그런 긴장감과 스릴감. 좀처럼 표출하지 못했던 내면의 못된 마음들을 가득 담아 타케루와 켄은 서로의 입술에 매달렸다.


그들은 이것을 애정이라고 불렀다.

 


Posted by 하리쿠
2016. 8. 22. 21:19

* 절단 소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타이치와 야마토가 병들어있습니다.

 

 

 

 





 

 

 

 

 똑똑. 문 앞에 선 죠가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조용한 그 집안에서는 들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죠는 얌전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리면 이시다 야마토, 라고 쓰인 문패가 있다. 이 집안에 있을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긴장감에 침을 꿀꺽, 하고 넘어간다. 양 손으로 메고 있던 크로스백의 가방끈을 꼬옥 쥔 죠가 문 안쪽에서 조용히 들리는 발소리에 문에서부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두드리고, 문이 열리기까지엔 시간이 조금 소요된다. 그것이 그들이 자신을 받아주기까지의, 그들만의 방어막이었다. 약간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 시간동안 자신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놀라지 않는다, 는 다짐을 한다. 문이 열리면 흘러나올 공기의 무거움의 무섭다. 상상만 해도 짓눌려버릴 것 같은 느낌에 죠는 차라리 빨리 문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을 견디면 잠시나마 그들의 사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문은 소리 없이 열린다. 천천히 열린 문 안에서 나온 타이치는 생각보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하고도 몇 번이나 차마 못 볼 몰골로 나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죠는 처음 타이치를 마주하는 것부터 긴장을 하고 있어야만 했다. 왔어? 그런 죠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듯이 타이치는 능숙하게 웃음지어 보인다. 휘어진 눈동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여기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럼에도 보고 싶다는 모순된 마음으로 부름에 응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애써 침착하게 대답하며 죠는 천천히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삐질삐질 흘렀다. 집 안의 진득한 공기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었다. 유난히도 야마토의 집 안 공기는 질척하게 들러붙어온다. 이것의 출처가 자신의 마음인지, 아니면 타이치의 행동인지, 그것도 아니면 야마토의 심정인지 알 수 없었다.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발을 들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거실을 죠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곳에 붉은 것이 가득했던 순간을 자신은 알고 있다. 아, 그래. 지금 이러한 방문의 시작지점이었다. 여름방학의 시작. 평소와 다름없이 공부를 하고 있던 날, 평소와 다름없이 타이치에게서 연락이 왔다. 삑삑 울리는 휴대폰을 한 번 바라보고, 오늘도 타이치 녀석은 건강하구만, 이라던가 이번 방학에도 일주일 전에 방학 숙제를 도와달라며 연락이 오는 거 아니야? 따위의 평소와 다름없는 생각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받았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시간 있냐고 물어보는 타이치의 가벼운 목소리에조차 평소와 다름없음이 느껴져 죠는 마음이 매우 느슨해져있다고 할 수 있었다. 타이치의 말을 들으면서도, 조금의 위화감조차 느낄 수 없었을 만큼.



“ 지금 야마토네 집으로 와줄 수 있어? 붕대나 소독약 같은 거 들고.”


“ 응? 다쳤어? 나보다는 병원에 가는 쪽이,”


“ 아니, 죠가 와야 해.”



 자신의 말까지 끊어가며 단호하게 요구하는 타이치의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갸웃하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의료도구를 챙겨 밖으로 뛰어나간 것은 타이치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평소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병원이 안 된다는 것은 혹시나 디지몬이라는 소리가 아닐까, 가끔 열리는 디지몬 세계로 가는 문에서 아구몬이나 가부몬이 나왔을 지도 몰라. 어쩌면 고마몬도 함께 있지 않을까. 그 중 누군가가 다친 걸지도 몰라. 디지몬의 일이라면 일반 병원에는 갈 수 없겠지. 그 세계에서 돌아온 이후로 더 중점적으로 의학 공부를 했다고 해도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밖에 되지 않은 일반 학생인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자신은 꽤나 침착하게 야마토의 집에 다다랐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의 자신이라면 더 허둥지둥 대며 어쩔 줄 몰라 했을 텐데, 그래도 자신이 성장하긴 했구나, 하는 뿌듯함마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 아, 왔어?”



 벨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며 자신을 맞이하는 타이치의 목소리는 경쾌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서 들어와, 들어와. 야마토의 집이 마치 자신의 것인 마냥 자연스럽게 인도하는 그를 보며 곧 너네 집이냐, 하는 야마토의 자연스러운 딴지가 들어올 것까지 예상하며 짧게 웃으며 들어선 야마토의 집에서는 피비릿내가 나고 있었다. 온 집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꽉 찬 냄새에 당황한 죠가 타이치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손목을 잡혔다. 신발조차 벗지 못한 채 타이치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한 죠가 본 광경은, 절대로 그가 상상하지 못할 범위 내였다.


 피 범벅이 된 거실 안에 두 다리가 잘린 야마토가 쓰러져 있었다. 아니, 쓰러져 있다기 보단 얌전히 누워 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잘려진 다리와 허벅지의 절단면을 본 순간 죠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야마토와는 멀어지는 자신과는 다르게 터벅터벅 야마토에게 다가간 타이치가 천천히 손을 뻗어 지혈을 위해 묶어놓은 것 같은 절단면의 약간 위를 쓰다듬는다.



“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일단 찾아본 대로 해보려 했는데, 영 제대로 안 돼서. 나, 손재주 없으니까 말이야.”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타이치에게 새삼스레 위화감이 느껴진다. 잠시 숨을 멈추었을 정도로 당황한 것은 맞았지만, 이대로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야마토에게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죠는 애써 자신을 다잡으며 가방 안에 넣어둔 의료용 장갑을 꺼내었다. 매, 맨 손으로 만지만 안 돼. 상, 처가 더, 덧날 수도…. 띄엄띄엄 말을 꺼내는 와중에서도 제대로 야마토의 환부를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잔인한 영화도 본 적 있었고, 집에 산처럼 쌓여있는 의료용 도서에 있는 더 징그러운 사진도 잔뜩 봤었지만 그 대상이 야마토라고 생각하니 몸이 떨릴만큼 무서웠다. 피부에 달라붙어오는 의료용 장갑을 낀 후에도 멈추지 않는 떨림에 죠는 주먹을 꾹 쥐고는 야마토의 옆에 주저앉았다. 헉, 헉, 하는 짧은 호흡이 들려온다. 다행히도, 아직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 했다. 죠가 야마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보며 타이치가 이리저리 널려있던 물건들을 하나 둘 씩 챙겨온다.



“ 뭐가 괜찮을지 몰라서 다 준비했었어. 필요하면 써도 돼.”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량의 과산화수소수, 알코올, 포바딘 같은 것들이 한 곳에 모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가져온 것보다 많은 양의 붕대와 거즈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이 상황을 예상한 것 같은 준비성에 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상황을 애써 지우려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왜 야마토가 이렇게 있는 것이며, 타이치는 여기에 있는 것일까. 왜 타이치는 이렇게도 침착하게 자신을 부른 거지? 자신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야마토의 환부를 향해 과산화수소수를 쏟아 부은 죠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 나, 나보다는 빨리 병원에 가는 편이….”


“ 가지 않아.”


“ 야마토가 위험할 수도…!”


“ 아니, 야마토는 죽지 않아.”



 어째서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거야? 하고 묻고 싶은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잘 철회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아는 타이치는 상황 판단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의대에 다다르지도 못한 그저 의대 지망인 중학생이고, 야마토는 진짜 환자다. 심지어 제대로 된 지식도 없는 자신이 보더라도 심각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환자를 대하는 것은 팔이 부러진 오가몬을 휴지로 치료해준 이후 처음이다. 그럼에도, 그 때의 자신은 생각보다 침착하게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야마토에게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아직도 거실을 보면 야마토가 누워 있던 그 때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아마 타이치는 자신이 그러한 탓으로 거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몇 번이나 타이치의 부탁으로 야마토의 집에 왔지만 그 이후로는 야마토가 거실에 누워있지 않았다.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곧바로 야마토의 침실로 걸음을 옮기면 자고 있었던 것인지 잔뜩 졸린 눈을 한 야마토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끔뻑끔뻑 졸고 있었다. 잘려있는 허벅지를 조이고 있는 붕대는 타이치가 틈틈이 갈아주고 있는지 깔끔하다. 바닥에 늘어져있는 얼룩덜룩한 붕대와 의료용 장갑, 한데 뭉쳐진 거즈를 순서대로 바라보던 죠의 얼굴이 급격이 빨갛게 물들었다. 팟,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버린 죠를 보던 타이치가 깔깔 웃으며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것을 손에 쥔다.



“ 아하하, 미안, 미안. 청소하는 걸 까먹었어.”



 깔끔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는 고무에서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희뿌연 액체가 조금 흐른다. 이런 것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의료용 장갑을 낀 죠가 야마토의 다리에 둘러져 있는 붕대를 푼다. 빨리 제대로 청소하라는 야마토의 잔소리에 타이치가 장난스럽게 받아치며 더러워진 방 안을 청소해나간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다. 야마토의 다리가 잘려진 것을 제외하면.


 처음 응급처치 후 집에 돌아가고, 자신은 필사적으로 책과 인터넷을 뒤졌다. 절단 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자신이 야마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없다는 사실에 몰려온 죄책감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음이 당연했고, 그것에 죠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음에도 그러했다. 책에서는 절단 시 환부를 피부로 감싸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지만, 그 정도까지의 기술은 죠에게 없었다. 제대로 후처리를 하지 않은 야마토의 환부에 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책을 뒤지고 있는 죠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도 야마토는 아직까지는 멀쩡했다. 타이치가 열심히 소독해주며 치료에 힘쓰고 있는 것을 반증하고 있기도 했고, 자신이 야매로나마 얻은 지식의 결과이기도 했다. 붕대를 풀어 외관상으로는 큰 이상이 없는 환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죠는 무거웠던 공기를 가득 내려놓을 수 있었다.



“ 그거, 나도 할 수 있는 거야?”



 확인을 마치고 나서, 절단된 부위의 구축을 막기 위해 꾹꾹 눌러 스트레칭을 해주고 있는 죠를 향해 타이치가 물었다. 청소를 끝낸 후 타이치는 감시하는 것처럼 벽에 몸을 기댄 후 자신과 야마토를 바라본다. 그 내려다보는 눈빛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타이치가 자신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열심히 따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타이치의 붕대 매는 실력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 아, 응. 여기 허벅지 앞에 근육이 짧아지기 쉬우니까 이렇게 늘려서….”


“ 응, 응.”



 천천히 설명을 시작하자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치가 오늘도 마찬가지로 평소와 같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것 마냥 무섭게 집중하는 타이치의 눈빛이 두려울 정도로 야마토의 다리를 향해 고정되어 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집착이, 죠는 손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그리고 그것의 결정체가 자신의 손이 닿아있는 이 다리다.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면 순전히 타이치만의 집착이었지만, 심지어는 그것조차 아니었다.


 야마토에게 병원에 가자고 말해본 적이 있었다. 타이치를 설득해 보자고. 이러다가 너가 어떻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이건 꼭 병원에 가야 하는 거라고. 왜 이렇게 된 것이냐고. 왜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냐고. 자신의 물음에 야마토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 내가 허락했어.”



 -하고. 얌전히 누워 있던 그 날의 야마토에게서 느낀 위화감의 정체였다. 야마토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타이치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버린 것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자신을 보며 야마토가 입술로 고운 호를 만들었다. 그의 웃음도 너무나도 평소와 같아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제 타이치에게서 도망치지 못해. 그리고, 타이치도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그게 이유야. 너무나도 덤덤히 이어지는 말에 죠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물이라도 가져오겠다며 나간 타이치가 돌아올 때까지. 당황한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타이치는 물을 야마토에게 건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다. 멀쩡한 팔으로 몸을 일으켜 물을 받아 마시는 야마토 또한 그것을 장난스럽게 받아친다.


이것 또한 너무나도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다. 야마토의 다리가 잘려진 것을 제외하면.


 그 엄청난 위화감을 죠는 얌전히 견딜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던 때, 야마토는 죠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 고 했다. 자신이 야마토의 말을 들어줄 수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죠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 외에는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심지어 그들의 부모님과 동생들조차 모르는 이 행위들을 얌전히 묵인하고 그들을 도와주며 그들이 혹시나 그들의 집착과 광기에 삼켜져 더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확인하러 오는 것 밖에 없었다.



“ 곧 여름 방학이 끝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네 아버지도 돌아오실 거야.”


“ 아, 그러네. 이제 어떻게 할까.”



 먹을 거라도 가져오겠다며 타이치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죠는 조심스레 야마토에게 말을 걸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냉정한 야마토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우리가 만났던 때처럼, 꿈만 같던 방학은 이제 끝나고 있다. 이제 그들도, 자신도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이다. 현실적으로 이 행위들을 들키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야마토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은 마냥 덤덤하게 답했다. 냉정한 야마토라면 이후의 일도 생각해 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그들은 그들 간의 집착에 몸을 맡겨버린 것이었다. 후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답지 않게.


 타이치가 디지몬 세계에서 돌아온 이후 멍하게 지내는 날이 많아졌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좋아하던 축구도 하지 않고 있다며 걱정하는 코시로의 목소리도 들었다. 그렇게 함께 지내던 디지몬들과 떨어졌으니 당연했다. 자신도 가슴 한 켠이 텅 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원했던 숙제를 하다가도 떠오르는 고마몬의 밝은 미소에 펜을 멈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야마토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그곳에서 많은 성장을 한 자신들과는 다르게 타이치는 조금 멈춰서있는 것 같았다. 가끔씩 게이트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타이치가 다시 축구를 시작하고 나서도 아마 상실감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 즈음이었다. 타이치와 야마토가 사귄다는 말을 들은 것은. 타이치가 멈춰 설 때 그를 이끌어주는 것은 항상 야마토의 몫이었다. 그 소식에 놀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둘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파국이 이것이다. 자신도, 이것을 해결할 방법 따윈 생각나지 않는다.



“ 아, 그러고 보니 말이야, 죠.”



 타이치처럼, 야마토 또한 너무나도 평소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다. 방금 자신의 물음조차 없었던 일처럼.



“ 자르기 전에, 타이치의 손이 떨렸었어. 지금의 너처럼.”


“ …….”


“ 그래서 내가 물었어. 무서워?”


“ …….”


“ 무섭지 않아, 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이 대답 말이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아? 아, 죠 너는 그 자리에 없었나.”



 자신이 모르는 일을 생각하며 야마토는 키득키득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그 표정에 죠는 다시 한 번 넋을 놓을 뻔 했다. 어떠한 상황이 다가와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 했지만, 이렇게 섬칫섬칫 느껴지는 그들의 어두운 밑면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야마토는 어딘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야마토는 쾌감마저도 느끼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하나가 된다는 거 말이야, 생각보다 엄청 기분 좋아.”



 어쩌면, 야마토는 타이치보다 더 미쳐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돌아갈게. 그…, 잘 알겠지만 야마토 붕대는 틈틈이 갈아주고. 스트레칭은 그렇게 자주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적당히 해줘.”


“ 응.”



 천천히 방문 앞을 나오는 자신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이미 타이치와 야마토는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타이치가 야마토보다 작은 체구로 그의 품에 안기면 야마토는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린다. 짧은 허벅다리로나마 어린아이처럼 허리를 감싸 안으면 타이치는 그를 가득 껴안은 채로 정말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한 채로 입을 맞춘다. 또 시작됐군. 고개를 조금 저으며 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문 잠구는거 잊지 말고! 하고 소리를 쳤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었다. 슬슬 이 장면에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도, 이러한 그들을 보고 있음에도 얌전히 어울려주고 있는 자신도, 어쩐지 그들과 비슷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면 그렇게도 무거웠던 공기가 가벼워진다.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자신에게도.

 

 




**


 

 준비물은 모두 갖추어져있었다. 결심한 이후, 둘이서 열심히 조사하고 사모은 것이었다. 야마토는 웃으며 벽에 기대어 길게 누웠다. 짧은 체육복 바지를 입고, 허옇게 드러나 있는 허벅지가 예쁘다. 타이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손을 뻗어 그것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길게 쓰다듬을 수 있는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일 터다. 아쉬움과 기대감을 가득 담긴 손이 야마토의 허벅지 위에서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야마토의 손이 그 위로 얹힌다. 그것에 용기를 얻은 타이치는 손을 뻗어 준비해 둔 끈으로 양 허벅지를 단단히 묶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니 야마토의 미간이 움찔, 한다. 조용히 진행되는 과정이 마치 하나의 의식 같았다. 타이치가 땀 젖은 손으로 날 선 칼을 쥔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둘의 입이 열렸다.

 

 


“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

 

“ 돌이킬 생각 없어.”

 

 

 

 


 

 

 

Posted by 하리쿠
2016. 8. 11. 22:35

08.21 디지몬 피오케 '내일 날씨는 맑음. 때때로 아이스크림'에서 다이켄/태일매튜 개인지가 나옵니다.

수량조사는 이쪽에서 해주세요 -> http://naver.me/Glqq3tds



* 다이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세계]






100-130p(예정) / 8000원 / 떡제본


다이켄적 관점으로 바라본 원작 재해석+둘이 결국 사귀게 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약간의 소프트 얀데레 소재가 들어있습니다. 민감하신 분은 주의해주세요.





* 태일매튜(타이야마) [니가 밑이야!]


(아직 미완성입니다. 후에 추가합니다.)



20-30p(예정) / R19 / 3000-4000원(예정) / 중철


태일이와 매튜가 침대포지션으로 싸우는 내용입니다.

한극식 표현을 쓰고 있으며 약간의 비속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마감을 위해 달리고 있습니다orz 제발 책이 나왔으면 좋겟다....

Posted by 하리쿠
2016. 7. 1. 21:20

- 유희왕 온리전 데스티니 드로에 발간된 십만 배포본 [ 일생의 파트너가 되어도 곤란하지 않은 십만 배포본 ]에 그냥 십마니로도 참여했었습니당

- 태그포스의 인생의 파트너 <-짤만 보고 혼자서 한 망상입니다 태그포스 내용과는 전혀 관련 없으며 내용이 달라도(다르겠지만) 태그포스를 해보지도 않은 저는 모릅니당^0^ㅎㅎ

 



 


 정령들도 모두 잠든 한 밤중, 조용히 스탠드의 불을 켜고 펜을 집어든 만죠메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런 만죠메의 인기척에 살짝 눈을 뜬 옐로가 형님께서 왠일로 공부를 하시려는 걸까, 하며 작게 중얼거리다 끝조차 맺지 못한 채로 까무룩 잠이 들어버릴 때까지 만죠메의 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 따라 자신이 이상했다. 수업시간에도 툭하게 멍하게 있곤 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정신을 못 차리다가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이 아닌 타바스코를 뿌려버리기까지 했다. 대체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어 아무리 고개를 저어 봤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다시 칠판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눈앞에는 쥬다이가 있었다. 처음엔 장난스러운 얼굴로 얄밉게 웃고 있던 그가 점점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쥬다이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순간, 만죠메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쥬다이의 생각으로 잠을 설치던 오늘, 만죠메는 결국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지금 당장 그와 자신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의내리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새하얀 종이에 커다랗게 유우키 쥬다이의 이름을 써넣고, 만죠메는 한참을 고민했다.


 유우키 쥬다이와는 악연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지금도 라이벌로써 이기고 싶었다. 분명 자신이 그를 바라보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라이벌이 생기면 이렇게 항상 보고 싶고, 그 녀석의 얼굴만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생각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지금까지 라이벌이라는 것을 만들어본 적이 없던 만죠메로써는 알 수 없었다. 라이벌, 하고 적힌 글자가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힘, 재주, 기량 따위가 서로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대. 사전적인 정의를 생각해보면 분명 자신과 유우키 쥬다이는 라이벌이 맞다.(옆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하며 누군가가 비웃은 것 같았지만 만죠메는 쿨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 더 복잡한, 어떠한 감정이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


 아, 그래. 사실은. 만죠메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쥬다이를 생각하는 것을 라이벌이라는 허울 속에 숨겨두고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만죠메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죠메는 그것을 다시 꺼내보기 두려워했다. 차마 그와 자신의 사이에 우정과 라이벌이라는 관계 외의 다른 것을 들이대기가 무서웠다. 혹시나 그가 눈치 채버릴 까봐, 그가 이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까봐, 만죠메는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돌려버렸다. 굳이 이렇게 정리하려고 하지 않아도 만죠메의 머릿속은 깔끔하게 답을 도출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종이의 끝에 아주아주 조그맣게 움직이던 펜이 좋아, 라는 글씨를 쓰다말고 멈추었다. 자신의 마음을 글씨로 확인하다니 이것만큼 부끄러운 것이 없었기에 재빨리 새까맣게 칠해버린 만죠메가 다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런 남사스러운 글자말고, 조금 더 순화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조금 더 명확하게, 조금 더 확실하게.



“ …아, 정말!”



 얌전히 자고 있던 정령들이 모조리 깰 만큼 큰 소리로 짜증을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린 만죠메의 방 쓰레기통엔,


『내 인생의 파트너가 되어줘, 쥬다이.』


볼펜으로 지우려 애쓴 흔적이 가득한, 정성이 가득 담긴 잔뜩 구겨진 편지가 하나.

Posted by 하리쿠
2016. 7. 1. 21:18

- 유희왕 온리전 데스티니 드로에 발간된 십만 배포본 [ 일생의 파트너가 되어도 곤란하지 않은 십만 배포본 ]에 ts 십마니로 참여했었습니당






 아, 하는 짧은 소리가 들려 만죠메는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에 앉아서 공부를 하던 쥬다이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입술을 꾸욱 누르는 것이 보였다. 건조한 바깥 날씨에 가습기를 틀어놓았지만 그럼에도 습기가 부족해 입술이 갈라져 버린 것일까. 천천히 떨어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옅은 핏물이 보인 것 같았다. 멍하게 바라보는 만죠메의 시선을 눈치 챈 쥬다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했지만 혀로 꾸욱 누르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꽤나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만죠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한참을 파우치를 뒤적이던 만죠메의 손에 들린 것은 스틱 형태로 된 립밤이었다. 별로 화장이나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유독 피부가 연약한 입술이 자주 텄기 때문에 챙기고 다니곤 했었다.



“ 아냐, 괜찮아.”


“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봐.”



 퐁, 하고 뚜껑을 여니 옅은 오렌지향이 올라왔다. 자신이 꺼내 든 것에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 그녀를 대충 진정시키고 가까이 다가가자 시선이 가까이서 마주 닿아 순식간에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는 착각이 들었다. 사실 달아오른 것은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과 예쁜 입술에서 도저히 시선이 벗어나지 않아 만죠메는 조금 침을 꼴깍 삼켰다. 이렇게 긴장해버릴 줄 알았다면 그녀에게 직접 바르라고 할 걸 그랬다. 그럼에도 이미 자세를 잡아버린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만죠메는 립밤을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표면에 잘 정돈된 손톱 끝이 닿아 살짝 떨렸다. 있는 힘껏 긴장을 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속눈썹 긴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걸.


 오늘도, 쥬다이가 자신의 집에 놀러온다는 말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얼마나 방 청소를 하고, 일부러 집임에도 불구하고 제일 예쁜 치마로 차려입고, 그것도 모자라 입술에 립밤과 잘 바르지도 않는 틴트까지 열심히 발랐는지 모른다. 머리를 풀까, 아니면 묶을까 거울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묶은 것이 더 예쁘다 했던 그녀의 말에 몇 번이나 실수하며 다시 올려 묶기도 했다. 혹시나 긴장한 자신의 모습을 들켜 버릴까봐 처음 그녀가 방에 들어올 때엔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 했다.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워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들키는 것은 더 부끄러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몰랐다. 그런 자신과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들어와, 예쁘게 꾸며진 자신의 방을 이곳저곳 둘러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마저 행복해 몇 번이나 식은땀이 흐르는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같이 공부를 하는 순간에서도, 몇 번이나 귓가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숨소리가 긴장되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녀에게 들리지 않기를, 하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지만 커다랗게 쿵쾅거리는 심장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립밤이 닿는 순간까지 쥬다이는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의 모양을 따라 바르고, 상처가 생긴 부분은 특히 신경을 써서 빙글빙글 돌려 꼼꼼히 바르고 나니 그녀의 입술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여 어쩐지 더 부끄러워졌다. 다, 됐다. 어쩐지 그녀의 입술을 한참을 바라보던 자신이 이상해서 급하게 립밤을 떼어냈더니 자신을 보고 있던 쥬다이가 눈을 살풋 휘어 웃었다.



“ 고마워, 쥰.”



 그것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눈앞에서 쥬다이의 갈색의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바른지 시간이 지나 건조해진 자신의 입술에 따듯하고 미끌거리는 쥬다이의 입술이 닿았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을 감는 것조차 잊어버려 트여있는 시야에는 꼬옥 눈을 감고 있는 쥬다이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맞닿았다 떨어진 입술에서 립밤과 동일한 달콤한 오렌지 향이 올라왔다. 어째서, 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쥬다이의 고개가 조금 갸웃거렸다.



“ 키스 해달라는 거 아니었어?”



 씨익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 만죠메는 차마 부정조차 할 수 없었다.

Posted by 하리쿠
2016. 7. 1. 21:01

- 다이스케는 라멘집 아르바이트. 켄은 대학생. 동거중.

- 손풀기용 전력 60분







 시험기간이라는 선언을 한 뒤로 켄의 취침시간이 줄었다. 매 학기마다 있는 일이었지만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로 눈 밑에 시커먼 다크서클을 달고 다니는 켄의 얼굴은 보기 힘들어 다이스케는 오늘도 방문 앞에서 조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서실에서 돌아와서도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공부에 열중하는 켄을 위해 함께 쓰던 방에서 나와 부엌과 이어져있는 작은 거실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3주째이다. 그렇다는 말은, 켄의 수면부족 생활도 3주가 넘었다는 말이 된다. 걱정을 하지 않을래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깨우지 않으면 함께 밥을 먹을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재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 켄. 아침이야. 일어나자, 응?”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다가가 살짝 몸을 흔든다. 동거 초, 자신이 제대로 일자리가 잡히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정 반대였지만, 이제는 자고 있는 켄을 깨우는 것도 익숙하다. 자신의 알바처는 식재료의 운반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서, 처음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라 억지로라도 일찍 일어나는 버릇을 들였다. 처음엔 몇 번 지각도 했지만, 부랴부랴 준비하는 생활을 바꾸기 위해 아침 당번을 도맡은 지도 일 년이 넘었다. 바른 생활 청년일 것 같았던 켄이 생각보다 아침에 약하다는 것과,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억지로 먹어왔지만 사실 아침엔 입맛이 없다는 사실도 그 때가 되어서야 알았던 것 같다. 달콤한 아침잠은 잃었지만 연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안 것과, 이렇게 곤히 자고 있는 연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즐거웠기에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오늘도 시험 날이라고 했었나. 책상 위에 놓인 켄의 전공 책의 어마어마한 두께에 혀를 내두르며 다이스케는 다시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누나가 대학교에 갔을 때엔 탱자탱자 노는 것으로 보였는데, 전공이 다른 탓인지, 아니면 성실한 그의 성격 탓인지 그의 대학 생활은 전혀 달랐다. 으응, 일어 났어…. 아직 잠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린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후우, 하고 평소보다 더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이스케가 켄의 귓가에 시험에 늦겠어, 하고 속삭였다.



“ ! 다이스케, 지금 몇 시!?”



 효과는 좋았다. 단숨에 벌떡 일어난 켄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시계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다이스케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깔깔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켄이 입술을 꾹 다물고 노려본다. 지난 학기, 자신이 깨워줬음에도 불구하고 식탁 앞에서 다시 잠이 들어 전공 시험 하나를 못 볼 뻔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켄이 시험 시간에 민감한 것을 알고 친 장난이었다. 이런 장난은 그만둬, 다이스케. 잠이 싹 달아난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이는 켄을 보며 다이스케는 아직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그의 작게 삐져나온 입술에 작게 키스했다.



“ 알았어, 미안해. 밥 먹게 나와.”



 마주 닿은 입술을 떼고 눈을 마주하며 씨익 웃으면 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조금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야만다. 어찌됐건 켄은 자신에게 약했다. 그랬기에 이렇게 함께 사는 것도 그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겠지. 먼저 방 밖으로 나와 접시를 늘어놓고 있자면 책상 정리를 끝마친 켄이 약간 뻗친 머리칼을 손으로 정리하며 식탁 앞에 앉는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눌려있는 뒷머리를 귀엽다고 생각하며 다이스케는 마시기 쉽게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작게 입을 벌려 하품하던 켄이 웅얼거렸다. 아침이라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 또한 아침의 묘미 중 하나였다.



“ 잘 먹었습니다!”

“ 입가심.”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외치자 포크로 접시 위에 놓인 방울토마토 하나를 콕 집은 켄이 자신에게 내밀었다. 아침 입맛이 없다며 잘 먹지 않으려 해 과일이나 샐러드, 작은 빵 같은 것을 준비하고 있것만 그것조차 먹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애교에 다이스케는 그대로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는다. 억지로 일어나서라도 켄이 자신의 아침 식사에 어울려주는 것은 자신이 애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졸린 눈가를 비벼가며 샐러드나 작게 자른 사과를 콕콕 집어먹어주는 그의 상냥함 또한 자신은 알고 있기에 이런 애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 다녀올께!”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나가기 전, 몇 개 남지 않은 켄의 접시 위 방울토마토 하나를 더 입에 던져 넣으며 인사하자 뒤에서 잠깐, 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신발을 신고 있던 그대로 우물우물 고개를 돌리자 아까보다 좀 더 말끔한 얼굴을 한 켄이 조금 웃으며 다가온다. 다녀와, 하고 고개를 내려 자신에게 입 맞춘 켄의 입술은 방금 전까지 그가 마시고 있던 커피향이 났다. 언제나의 평화로운 아침이다.

 

Posted by 하리쿠
2016. 6. 29. 18:29

- 나홀로 전력 60분

- 타이야마님을 위한 소재는 '벽, 상흔', 중심 대사는 '네가 미안해 할거 없어. 모두 내가 한거니까.' 입니다. 씁쓸한 분위기로 연성하세요.

 

 

 




 타이치,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 없이 다정하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물음에 타이치는 무릎 사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베시시 웃었다. 복도에 위치한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은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야마토의 자취방 앞에 주저앉았을 때만해도 밖에 훤했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그저 그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대답을 바라지 않는 물음은 퍽이나 다정하다.



“ 너 기다렸지.”


“ 웃기고 있네.”



 우습지도 않다는 듯 입 꼬리를 비틀어 웃기 전, 잠시 굳은 너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해야 하는 행동은 그것을 모르는 척 자연스레 자신에게 뻗어오는 너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것 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킬 때 코끝에 스쳐지나간 너의 목덜미에서 나는 네 것이 아닌 여자 향수의 향마저 모르는 척 하며. 언제나 네가 그래왔듯이. 서로의 속마음까지 모두 다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다 비쳐 보이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자신이 일어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야마토는 바지 주머니 안에서 열쇠를 꺼내었다. 달랑거리는 야마토를 본 따 만든 인형 옆에 보지 못한 열쇠고리가 달려있었다. 여자에게 인기 많은 그의 열쇠고리가 한 두 개쯤 바뀌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었기에 하나하나 물어보기 지겹다. 어색한 손놀림으로 열쇠고리를 손바닥에 쥔 야마토가 문고리에 열쇠를 끼워 넣는다. 야마토의 손놀림이 어색하다는 것을 자신이 눈치 챈 것처럼 야마토 또한 자신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바짝 설 수 밖에 없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그를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 들어와서 물이나 한 잔 마시고 가. 손도 치료해줄 테니까.”



 철컹, 소리 내며 열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린다. 슬쩍 보이는 방 안은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언젠가 어렸던 자신이 그저 노는 것을 목적으로 야마토의 집에 즐거이 놀러갔을 때, 홀로 있던 야마토의 뒤로 보인 것처럼. 필요 없다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의 집 문을 비집고 쿵쾅쿵쾅 들어와 거실에 누워버렸던 어린 시절처럼 아무런 부담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간 세월만큼 쌓여버린 생각과 감정들이 벽처럼 자신들의 사이를 막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타이치는 어떻게 알았냐며 다시금 실실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상처가 생겨버린 주먹을 꾹 쥐었다 펴보이며.


 밖에서 닫혀있는 창문을 통해 불이 꺼져있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굳이 벨을 눌러보는 것은 버릇과 비슷했다. 어린 시절처럼 외로워 보이는, 약간의 겁을 먹은 것 같은, 그럼에도 누군가 왔다는 사실에 조금 기대해버리는 표정의 야마토가 나온다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아직도 약간이나마 남아있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미련처럼. 이제는 야마토가 집에서 홀로 밥을 먹고, 텔레비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럼에도 빠르게 가지 않는 시계를 한없이 눈으로 살피다가 차게 식어버린 이불 속에 들어가 홀로 잠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자신들 이외의 친구가 생기고 서서히 홀로 서나가는 야마토를 바로 옆에서 보고 있었음에도 그 때의 야마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아직도 어렸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 꽈악 쥔 주먹을 벽에 휘둘렀던가. 욱씬욱씬 올라오는 그 주먹의 통증에 그제야 자신이 이렇게 현재에 서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받으며 열리지 않는 문 옆에 다시금 주저앉았던가.


 자신이 이렇게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에는 열리는 그 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이 미련에 야마토는 단 한 번도 도망가려 하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부터인가 늦게 들어오는 그에게 이유를 물어본 적이 없고, 그는 기다리는 자신을 거부한 적이 없다. 자신이 그를 기다리지 않으면 반대로 그가 자신에게 찾아오기도 했다. 나의 감정과 그의 감정이 같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암묵적으로 서로 모르는 척 하기로 한 것이다.


 타이치는, 이것이 자신의 일방적인 관계였으면 했다. 얽힌 관계일수록 멀어지기 두려우니까. 언제나 자신이 이렇게 기다려야만 하는 관계가 편하니까. 문을 열어주는 야마토의 마음을 애써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조차 않았다.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인 그대로, 언제나 이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관계가 진전되지 않았으면, 했다.


 타이치는 실례하겠습니다, 하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야마토는 언제부터 그런 인사를 했냐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다. 겁쟁이들은 웃는 얼굴이다. 그리고, 겁쟁이들은 그 웃는 얼굴이 영원했으면, 하는 바보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Posted by 하리쿠
2016. 6. 28. 03:39

 켄에게 고백했다.


 더운 여름하늘, 신나게 달리느라 땀에 젖은 등판, 목구멍을 넘어가는 시원한 음료수. 뛰는 게 많이 빨라졌네, 하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너를 바라보자 그늘 안에 있는 우리들을 향해 살며시 다가오는 서늘한 바람. 흩날리는 가벼운 머리칼과 그것이 불편한지 얇은 손가락을 들어 귀 뒤로 넘기는 너의 별 의미 없는 행동. 그것들을 이유라고 들 수 없을 만큼 네가 너무나도 예뻐 바람에 흘러가듯이 좋아해, 하고 흘러넘친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는 네가 예쁘다. 단정한 머리칼도, 함께 축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철의 뜨거운 태양 볕에 검게 타버린 나와는 다르게 살짝 붉어졌을 뿐 새하얀 피부도, 놀란 탓에 살짝 작아진 동공도, 그 밖의 짙은 눈동자의 색까지도 하나도 빠짐 없이 예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내 표정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웠을 것이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벌어진 입술이 꾹 닫힌다. 장난 끼 하나 없는 내 얼굴에 눈치 빠른 켄은 이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런 무드 없이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 주체할 새도 없이 넘쳐버린 감정을 어찌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응, 하고 입술도 벌리지 않은 채로 대답한 켄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놀람은 자신의 감정을 알아챈 그것이 아니다. 평범한 이성관계가 아닌 같은 것이 달린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이 저렇게 덤덤한 반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치 채고 있었구나, 내 마음을. 남의 감정에 민감하고 눈치 빠른 그가 자신의 서투른 눈속임에 넘어갈 리가 없었음을 새삼 깨달은 것 같아 다이스케는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앞에 고정한 너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꼼지락 거리는 자신의 손끝이 뭉툭하다. 등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져 순간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말 없는 너의 반응이, 아무런 대화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그 무거운 공기가 무섭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쏟아버린 물을 어찌할 수가 없다. 조금만 더 숨겨놓을 것을, 그가 모른 척 해준 그 시간들을 헛되게 하는 짓만은 하지 말 것을, 지금까지도 잘 했는데, 어째서 오늘 자신은 저질러버린 것일까. 울컥 차오르는 후회에 이를 악 문 다이스케를 향해 조용히 켄은 그래서? 하고 물었다.



“ 어?”


“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해?”



 너의 표정은 아직도 복잡하다. 얼굴만으로 남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직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친구로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 선을 넘으면 닿을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멀어져버린다. 나는 왜 켄에게 말하고야 말았을까, 대체 그에게서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보통 좋아하는 사람과 무얼 하는 것인지,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어 다이스케는 조심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켄의 시선이 한없이 진지하다. 내 표정을 살피는 듯이, 반응을 두려워하는 듯이, 조금은 기대하는 듯이, 그것을 애써 숨기려 하는 듯이 조금 흔들리던 동공이 조심히 깜빡였다.



“ …모르겠어.”



 솔직하게 대답하자 켄의 날카로운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진다. 그걸로 됐어. 예쁘게 웃으며 가볍게 일어선 켄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 집으로 가자. 아줌마께서 기다리시겠어. 너의 목소리는 어딘가 후련해보였다. 사뿐사뿐 앞으로 나아가는 네게 홀린 듯이 따라나선 내 발걸음은, 마치 진득이는 것이라도 밟은 듯이 떼는 것 하나하나가 힘들 정도다. 역시 실언을 해버렸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죄라도 지어버린 것 같아 다이스케는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시간을 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켄을 보며 호들갑을 떠는 가족들은 항상 부끄러웠지만, 오늘은 그런 분위기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놀아줘서 기쁘다고, 나도 켄처럼 축구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동시에 공부도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켄이 저녁을 먹는 내내 입 아프게 떠들어대는 엄마를 보며 다이스케는 조금 입술을 삐죽이는 것으로 그쳤다. 집에 오는 내내 켄과의 사이가 불편했다. 바로 단 둘이 되어버린다면, 자신은 그 분위기에 짓눌려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 집에 놀러왔을 때와는 다르게 능숙하게 받아치는 켄이 웃었다. 그가 그의 팬들을 대할 때 짓는 웃음이었다.



“ 나, 가서 간식이라도 가지고 올게.”



 오늘 그를 초대한 목적은 숙제의 도움을 바랬기 때문이었다. 숙제는 혼자 하는 것이라 잔소리를 하면서도 켄은 결국 자신에게 상냥했다. 자신의 상상 속 오늘은 켄과 어색하지 않은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자신은 끝까지 게으름을 피울 것이고, 켄은 그런 자신을 달래며, 때로는 조금 심술을 부리며 함께 숙제를 해 나갈 것이었다. 결국 자신은 자신을 도발하는 켄에게,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는 켄에게 넘어가 끝까지 숙제를 끝내겠지. 그리고 우리는 그 성취감에 함께 마주보며 웃을 터였다. 이렇게 내가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닌.


 자신이 들고 있는 쟁반에는 두 개의 오렌지 주스와, 쿠키가 놓여 있다. 켄에게 한 문제라도 더 배우라는 둥, 켄을 조금이라도 본받으라는 둥의 이야기를 하는 엄마에게서 팩 등을 돌려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향했지만 다이스케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조금 더 망설여야만했다. 나는 켄에게 고백을 하여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보통 고백을 하면 어떻게 되지? 연인 관계가 되나? 나는 켄과 연인 관계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켄은, 왜 그런 자신을 향해 웃었던 것일까. 온통 모르겠는 것 투성이다. 이렇게 돼서는 후에 할 공부에 집중을 할 수도-평소에도 그다지 집중을 하지는 않지만-, 켄과 함께 있는 공기에 안도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에 쥐고 있는 쟁반이 조금 떨렸다.



“ 안 들어와?”



 자신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문이 살며시 열렸다. 자신이 앞에 서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켄은 문을 채 다 열기도 전에 목소리를 그 틈사이로 흘려 넣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켄을 따라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사르르 내려앉아 있다. 그런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로 다이스케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남는 손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어. 자신이 들어도 확실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에 켄은 조용히 웃으며 그랬구나, 했다.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목소리였다.



“ 저기 말이야, 다이스케.”



 나의 오렌지 주스가 바닥을 보이고, 켄의 오렌지 주스가 반 정도 없어졌을 시점이었다. 나가서 주스를 더 받아와야 하나, 이 문제까지만 풀고 나갈까, 를 고민하고 있던 나를 켄이 조용히 불렀다. 문제를 푸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지만 정 반대로 자신은 완전히 책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애써 모든 신경을 다른 것으로 돌리려 하는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다이스케는 최대한 이 어색한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응? 아무렇지도 대답을 하자 켄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져왔다. 손끝으로 볼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켄은 조심히 자신의 고개를 그의 쪽으로 돌린다. 볼에 가해진 압력으로 켄과 시선이 마주하자 어깨가 움찔 떨렸다. 푹 내려진 시선에 켄의 노트가 보인다. 아까 전에도 저 페이지였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진도가 거의 나가있지 않다. 집중력 좋은 켄이 이럴 리가 없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그의 노트 위에 쓰여진 정갈한 글씨를 바라보는데 다시 한 번 위에서 다이스케, 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은 정말 이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는 척 하려 했다. 자신이 무심코 내뱉었던 그를 향한 감정도, 그것에 대한 그의 반응도, 그 찜찜함을 모두 모르는 척 하면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미련하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향해 답하려 벌어졌던 입이 그대로 제대로 된 단어조차 만들지 못하고 공중에서 뻐금거렸다. 뒤통수가 순식간에 바닥에 닿았음에도 아프지 않았던 것은 켄의 손이 받혀주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시야가 뒤바뀐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던 형광등의 불빛이 켄으로 인해 가려진다. 마치 커튼처럼 내려온 켄의 머리칼이 자신의 시야를 오롯이 그만을 향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잠시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눈을 끔뻑이자 고운 호를 그리고 있던 켄의 입술이 움직였다.



“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 다이스케.”



 조곤조곤 말을 전해오는 켄의 목소리가 간지럽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도망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옆에 말뚝처럼 박혀있는 켄의 팔이 단단하다. 눈을 굴려 자신이 향할 곳은 켄의 올곧은 시선밖에 없음을 알아채고 나서야 다이스케는 다시금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꿀꺽, 하고 작은 목구멍 사이로 침이 넘어갔다. 자신의 목울대가 울리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응.”


“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해?”



 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자신의 숨이 그에게 닿을까 급하게 숨을 들이쉰 다이스케가 눈을 꾸욱 감았다. 눈 깜짝할 새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제대로 이해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긴장된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그의 얼굴이, 입술 새로 조심스레 드나드는 그의 숨결이, 살짝 벌어져있을 입술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곧 닿을지도 몰라, 조금만 더 있으면. 그렇게 생각이 떠오를수록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몸과는 별개로 시끄럽게 쿵쿵 뛰어대는 심장소리가 몸 안에서 제멋대로 울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은 것을 승낙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거부하지 않은 것을 그리 생각한 것인지 가려진 시야의 위화감이 점점 다가온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입술이 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꾸욱 누르듯이 맞춰온 입술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다이스케는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치 하늘하늘 내려온 꽃잎이 자신의 입술에 스쳐지나간 것 같은 짧은 키스-라고 말하기도 애매한-였기에 기다린 시간이 무색할 정도였던 것이다. 참고 있던 숨의 탓인지, 아니면 그 잠시나마 입술이 닿았다는 사실 탓인지 얼굴에 피가 몰려 단숨에 더워졌다.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어쩐지 붉어졌을 것만 같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눈앞에는 여전히 빛을 등지고 있는 켄이 있었다. 자신은, 정말 그와 입을 맞춘 것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심히 벌어진 입술이 조금 오물거리다 닫힌다. 멍청하게 그저 켄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금 그의 입술이 휘어진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쁜 미소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자신의 위에서 일어난 켄이 한껏 내려와 있던 머리칼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긴다. 얇은 손가락 끝에 엉겨있던 가는 머리칼이 단정하게 정리되는 모습을 다이스케는 몸을 일으키며 멍하게 보고 있어야만 했다. 여전히 그 고운 미소에 눈조차 떼지 못한 채.



“ 저기, 다이스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던 얇은 손이 살포시 다이스케의 허벅지 위로 내려앉는다. 더듬는 듯이, 쓰다듬는 듯이 조금 압력을 가하여 내리누른 켄이 다이스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였다. 휘어진 눈꼬리. 조금 올려다보는 눈동자. 하얀 피부. 어깨 위에 단정하게 내려앉은 머리칼. 그리고 여전히 예쁜, 방금 전 나와 닿았던 얇은 입술. 


 어째서 켄이 자신에게 키스를 해온 것인지, 자신은 그런 그를 받아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켄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것을 전했다. 켄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왜? 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했지. 나는 무엇을 원해야만 했을까. 켄은 무슨 대답을 바랬을까. 나는, 이런 것을 바란 것일까. 이 모든 물음에 답을 내놓을 수 없었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켄이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켄에게 확실하게 홀려가고 있다.



“ 더 한 것도 할 수 있어?”



 서서히 다가오는 켄의 말에 다이스케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조금 뒤의 이야기.

 

Posted by 하리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