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24. 00:29

- 다이켄을 위한 연성 주제 : : 널 보고 웃을 수 있을까?/가을날/눈물

- 짝사랑(http://bit.ly/1M6T88u)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읽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에 문제는 없습니다.

- 언제나의 그 내용.


 







 그래. 슬슬 이렇게 될 것이라고 켄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고, 어떠한 목표가 있으면 그것을 향해 똑바로 뛰어가는 녀석이다. 다이스케를 만나는 것을 그만두고, 전화를 하는 것도, 심지어 메일을 주고받는 것조차 그만둔 이후 자신은 어쩌면 이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기였다. 켄은 너무나도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옅은 쾌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안녕?”



 다이스케는 그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해온다. 그 나름대로 어색함을 지우기 위한 행동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연락을 받지 않는 내가 어색한 것인지, 그가 혼자서 했을 자책감으로 인한 거리감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모두 다일지도 모르지. 켄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척을 하고, 천천히 강변가로 걸음을 옮긴다. 자신의 뒤로 쫓아오는 다이스케의 발소리가 들렸다. 켄은 다이스케에게 보이지 않도록 숨을 몰아쉰다. 그래,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락을 받지 않는 나에게 초조해진 너가 찾아오는 이 순간을. 너를 마지막으로 만날 이 순간을.



많이, 바빴어?”


.”



 자신을 한 번, 흐르는 강물을 한 번 바라본 다이스케가 조심히 입을 연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연락을 못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고 있는 자신을 본 다이스케는 마침내 도달했을 것이다. 마음 속 저 편에 밀어두었던 불안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정말로 다이스케를 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다이스케는 이토록 조심스레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이겠지. 마치 네가 나를 동료로 끌어들이기 위해 찾아왔던 그 때처럼.


 걱정했었어. 미안해. 단조로운 대화가 딱딱하게 이어갈수록 켄은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를 만나면 흘러넘쳐버릴까 걱정했던 그 감정들이 오히려 메말라가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 해오던 일이었다. 다이스케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고, 그 때야말로 자신은 그에게 끝을 고할 것이다. 자신은 더 이상 다이스케를 그저 우정으로만, 친구로만 대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다. 있어선 안 된다. 곁에 있으면 나는 계속 다이스케에게 욕정 해버릴 테니까. 자신의 더러운 욕망에 휘둘리는 다이스케를 더 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것조차 자신의 이기심임은 알고 있었다. 다이스케를 멋대로 좋아해놓고, 이제는 멋대로 떠나가려 하다니. 다이스케는 이런 나를 놓치려하지 않을 것이다. 다이스케는 밝은 아이였고, 그의 세계는 그에게 상냥했다. 다이스케였기 때문에 가능한 세계였다. 그런 그는 아마 이별에는 무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떠나가는 것을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포기할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가 자신에게 질려버렸으면 했다. 붙잡는 다이스케에게 자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가 자신을 혐오해버렸으면 했다. 자신에게 화를 내 주었으면 했고, 자신을 어처구니없는 이상한 아이로 기억했으면 했다. 내가 그를 떠나는 것이 아닌, 그가 자신에게서 떨어졌으면 했다. 켄은 몇 번이나 곱씹었던 수많은 문장들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를 더 상처 입힐 수 있는 말이 필요했다. 그가 자신을 더러워하고, 싫어하고, 다시는 다가오지 않을 말이 필요했다. 그런 이별을, 나는 웃으며 너에게 전하고 싶었다.



다이스케.”



 왜 내 연락을 받지 않았어?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그를 조용히 부른다. 노을이 내려앉은 강물을 보고 있던 다이스케가 움찔 어깨를 떨며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방금까지 했던 아무 의미 없는 대화는 이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어라 말을 하고 있던 다이스케가 벌어진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진다. 지금부터 할 말이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이유임을 알고 있는 듯 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것은 내 욕심이다더 이상 너의 흔적을 더듬으며 자신을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너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귀와 눈을 닫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너를 만나는 것조차 겁내며 도망 다니고 싶지 않았다. 너가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불안해하고, 기대하며 날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너를 마지막으로 볼 날을 기다리던 하루하루는 마치 지옥 같기도 했고, 천국 같기도 했다. 빨리 너를 떨쳐내고 싶었고, 미련하게 붙잡고 있고 싶었다. 모순된 감정을 가진 자신을 비웃으며 켄은 다이스케와 시선을 맞춘다.


 평소보다 진지해 보이는 눈이 노을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얼굴을 한 그는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있는 다이스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괜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를 더 찬찬히 바라볼 수 있도록, 기억 속에 각인할 수 있도록 시간이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이 정도의 억지는 부려도 괜찮다고 또 다시 이기심을 부렸다. 뒤에서부터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다이스케의 머리칼이 흔들린다. 내가 반했던, 좋아했던, 계속 곁에 있고 싶었던 그 얼굴을 하고 너는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어야만 하는데. 웃어야만 했는데.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처럼 노을에 젖은 붉은 강물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고 생각했지만 파도처럼 한 순간에 복받쳐온다. 이 상태로는 자신은 덤덤하게 그에게 이별을 고할 수 없었다. 아직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입 주위의 근육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널 보고 웃으면서, 세상에서 제일 싸늘한 말을 꺼내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이미 무너져 내린 둑은 흘러 넘치는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투둑, 하고 형태가 된 마음이 뺨을 타고 흐른다.



좋아해.”



 수 없이 머릿속에서 반복했던 이별은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Posted by 하리쿠
2017. 1. 16. 04:18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2016. 12. 31. 04:34

천천히 잠에서 깨었을 때엔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시트와 이불이었지만 켄은 이 침대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조금 더 이불 속으로 넣으며 움직이자 엉덩이 쪽에서 아릿한 둔통이 올라온다. 찝찝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오늘 타카이시 군이 콘돔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타카이시 군은 행위가 끝난 후 뒷정리 같은 귀찮은 것을 해주지 않는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찝찝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잠에 들기 위해 뒤척이는데, 이치죠우지 군,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 꺼져있는 책상 쪽에서이다.



있었다면 인기척 정도는 내 줬으면 하는데.”


그 정도는 알아서 느끼라구.”



 자신이 이불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서야 책상 위에 놓여진 스탠드를 켠 타카이시 군이 자신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 했다. 자고 있는 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니 취미가 나쁘다. 자신이 일어난 것을 눈치 채고 나서도 인기척을 내지 않은 것도, 자신이 다시 잠이 들려 할 때 방해하듯이 이름을 부른 것도 일부러 였을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것이 그다워 켄은 잠자코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가 굳이 다시 자려는 자신을 부른 것은 자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질렸기 때문일 테니까. 천천히 침대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카이시 군이 그가 마시고 있던 컵을 자신에게로 내민다. 켄은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고, 그 컵을 받아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데운 우유였다. 이 또한 일부러 일 테다.



저녁 먹고 갈래? 편의점 음식이지만.”


먹고 싶지 않아.”



 아, 그래. 가볍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타카이시 군은 닫혀있는 방문을 연다. 단번에 쏟아진 거실의 불빛에 켄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에게 물어본 말은 아마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이인분의 음식을 데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먹겠다고 해도 가볍게 답을 하고는 그제부터야 무엇을 먹일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고, 아마 지금 같은 기분 나쁜 웃는 표정을 하고는 저녁을 먹는 자신을 압박하듯이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우유부터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일 테니까.


 켄은 먼저 나가버린 타케루를 바라보며 바닥을 향해 발을 내렸다. 깔끔하게 접혀져 있는 자신의 옷이 놓여있다. 방금 전까지 따듯한 이불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춥지는 않았지만 켄은 간단히 속옷과 바지만을 입고 방 밖으로 나선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다리로 방사통이 이어졌지만 이 또한 익숙한 통증 중 하나였다. 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손에 들려있던 컵을 내려놓는다. 당연하게도 한 입도 대지 않았다. 자신의 불편한 걸음을 감상하듯 탁자에 앉아있던 타카이시 군이 그 안으로 조금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날카로워진 시선을 받으며 켄은 다른 컵에다 냉장고에 있던 냉수를 따른다. 불쾌해 보이는 저 표정과 시선이 만족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벌써 저녁 시간대네. 자신이 타카이시 군의 집에 들어온 것은 분명 학교가 끝난 직후였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잤다고 생각하며 켄은 베란다의 문을 연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아직 덜 깬 자신을 깨워주는 것 같았다. 꽉 막혀 질식할 것 같이 무거운 집 안의 공기보다는 훨씬 낫다. 자신이 오래 자버린 것은 그가 무리를 시켜서 일 것이다. 자신을 미묘하게 불쾌하게 만드는 엉덩이 쪽의 통증도, 기운이 나지 않는 나른한 기분도, 순식간에 없어져버린 자신의 느긋한 저녁 시간이 사라져버린 이유도 모두 그였다. 불쾌한 기분이 올라온다. 그리고, 이 기분을 표출할 수 있는 상대는 자신의 앞에 있었다.



타카이시 군.”



 컵에 든 냉수를 모두 입 안으로 털어 넣은 켄이 타케루를 향해 몸을 완전히 돌리며 그를 부른다. 자신이 걸어가는 것도, 서늘함에 몸을 조금 떠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천천히 베란다로 보이는 아래를 바라보는 것도 마치 텔레비전 브라우관 속에서 펼쳐지는 쇼를 보는 것 같이 그저 방관자처럼 보고 있던 타카이시 군이 새삼 눈을 어린 아이처럼 뜨고 깜빡인다. 그는 자신이 그를 부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켄은 베란다의 난간에 편하게 몸을 기대어 섰다. 이 위치라면 밖에서는 자신이 완전하게 보일 것이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면, 그 마저도.


 저녁 시간이 되어간다는 것은 검도를 하기 위해 밖에 있던 이오리 군이 돌아온다는 소리다. 일을 하는 식구들을 위해 다른 집안보다 조금 저녁 식사를 일찍 시작하는 미야코 씨가 편의점의 다른 가족들을 부르려 나올지도 모른다. 히카리 씨는 저녁 식사 전에 미야코 씨의 편의점에서 그녀가 추천해 준 물을 사가곤 했었다. 그런 히카리 씨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이스케 또한 그녀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위해 미야코 씨의 편의점 앞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렇게 타카이시 군이 사는 멘션 앞을 지나가게 된 그들이 그다지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와 그가 키스라도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 좋은 타카이시 군은 어떻게 그 상황을 수습하려 애쓸까. 그 사람 좋은 타카이시 군이, 사실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보고 있는 외면의 타카이시 군은 사실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고, 제일 친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자신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평생 모른 채로 살아갈까.


 켄은 타케루를 향해 손짓한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한 제일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부르면 분명 타카이시 군은 자신의 의도를 바로 눈치 챌 것이다. 그와 자신은 정말 비슷한 면이 있어서, 서로의 생각 따윈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쪽의 목적이 그저 상대를 불쾌하게 하기 위한 종류의 것이면 더더욱. 그리고 상냥하고, 온화한 우리는 이런 것을 표출할 상대가 서로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심술을 받아주는 것처럼, 타카이시 군도 분명 모든 의도를 파악하고 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줄 것이다.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난 성격 나쁜 이치죠우지 군이 제일 좋아.”


나도.”



 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온 타카이시 군을 마치 연인처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켄의 의도에 넘치게 응하려 타케루는 그의 남색 머리칼을 휘어잡는다. 강제로 키스하는 듯이 켄의 고개를 억지로 꺾고, 입술을 잡아먹을 듯이 가득 삼킨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켄이 밖으로 떨어질 듯 몸을 휘청거렸다. 마치 이대로 떨어지고 싶은 듯 했다. 우연을 가장하여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은 듯도 했다. 그런 긴장감과 스릴감. 좀처럼 표출하지 못했던 내면의 못된 마음들을 가득 담아 타케루와 켄은 서로의 입술에 매달렸다.


그들은 이것을 애정이라고 불렀다.

 


Posted by 하리쿠
2016. 8. 22. 21:19

* 절단 소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타이치와 야마토가 병들어있습니다.

 

 

 

 





 

 

 

 

 똑똑. 문 앞에 선 죠가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조용한 그 집안에서는 들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죠는 얌전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리면 이시다 야마토, 라고 쓰인 문패가 있다. 이 집안에 있을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긴장감에 침을 꿀꺽, 하고 넘어간다. 양 손으로 메고 있던 크로스백의 가방끈을 꼬옥 쥔 죠가 문 안쪽에서 조용히 들리는 발소리에 문에서부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두드리고, 문이 열리기까지엔 시간이 조금 소요된다. 그것이 그들이 자신을 받아주기까지의, 그들만의 방어막이었다. 약간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 시간동안 자신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놀라지 않는다, 는 다짐을 한다. 문이 열리면 흘러나올 공기의 무거움의 무섭다. 상상만 해도 짓눌려버릴 것 같은 느낌에 죠는 차라리 빨리 문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을 견디면 잠시나마 그들의 사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문은 소리 없이 열린다. 천천히 열린 문 안에서 나온 타이치는 생각보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하고도 몇 번이나 차마 못 볼 몰골로 나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죠는 처음 타이치를 마주하는 것부터 긴장을 하고 있어야만 했다. 왔어? 그런 죠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듯이 타이치는 능숙하게 웃음지어 보인다. 휘어진 눈동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여기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럼에도 보고 싶다는 모순된 마음으로 부름에 응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애써 침착하게 대답하며 죠는 천천히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삐질삐질 흘렀다. 집 안의 진득한 공기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었다. 유난히도 야마토의 집 안 공기는 질척하게 들러붙어온다. 이것의 출처가 자신의 마음인지, 아니면 타이치의 행동인지, 그것도 아니면 야마토의 심정인지 알 수 없었다.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발을 들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거실을 죠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곳에 붉은 것이 가득했던 순간을 자신은 알고 있다. 아, 그래. 지금 이러한 방문의 시작지점이었다. 여름방학의 시작. 평소와 다름없이 공부를 하고 있던 날, 평소와 다름없이 타이치에게서 연락이 왔다. 삑삑 울리는 휴대폰을 한 번 바라보고, 오늘도 타이치 녀석은 건강하구만, 이라던가 이번 방학에도 일주일 전에 방학 숙제를 도와달라며 연락이 오는 거 아니야? 따위의 평소와 다름없는 생각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받았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시간 있냐고 물어보는 타이치의 가벼운 목소리에조차 평소와 다름없음이 느껴져 죠는 마음이 매우 느슨해져있다고 할 수 있었다. 타이치의 말을 들으면서도, 조금의 위화감조차 느낄 수 없었을 만큼.



“ 지금 야마토네 집으로 와줄 수 있어? 붕대나 소독약 같은 거 들고.”


“ 응? 다쳤어? 나보다는 병원에 가는 쪽이,”


“ 아니, 죠가 와야 해.”



 자신의 말까지 끊어가며 단호하게 요구하는 타이치의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갸웃하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의료도구를 챙겨 밖으로 뛰어나간 것은 타이치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평소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병원이 안 된다는 것은 혹시나 디지몬이라는 소리가 아닐까, 가끔 열리는 디지몬 세계로 가는 문에서 아구몬이나 가부몬이 나왔을 지도 몰라. 어쩌면 고마몬도 함께 있지 않을까. 그 중 누군가가 다친 걸지도 몰라. 디지몬의 일이라면 일반 병원에는 갈 수 없겠지. 그 세계에서 돌아온 이후로 더 중점적으로 의학 공부를 했다고 해도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밖에 되지 않은 일반 학생인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자신은 꽤나 침착하게 야마토의 집에 다다랐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의 자신이라면 더 허둥지둥 대며 어쩔 줄 몰라 했을 텐데, 그래도 자신이 성장하긴 했구나, 하는 뿌듯함마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 아, 왔어?”



 벨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며 자신을 맞이하는 타이치의 목소리는 경쾌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서 들어와, 들어와. 야마토의 집이 마치 자신의 것인 마냥 자연스럽게 인도하는 그를 보며 곧 너네 집이냐, 하는 야마토의 자연스러운 딴지가 들어올 것까지 예상하며 짧게 웃으며 들어선 야마토의 집에서는 피비릿내가 나고 있었다. 온 집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꽉 찬 냄새에 당황한 죠가 타이치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손목을 잡혔다. 신발조차 벗지 못한 채 타이치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한 죠가 본 광경은, 절대로 그가 상상하지 못할 범위 내였다.


 피 범벅이 된 거실 안에 두 다리가 잘린 야마토가 쓰러져 있었다. 아니, 쓰러져 있다기 보단 얌전히 누워 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잘려진 다리와 허벅지의 절단면을 본 순간 죠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야마토와는 멀어지는 자신과는 다르게 터벅터벅 야마토에게 다가간 타이치가 천천히 손을 뻗어 지혈을 위해 묶어놓은 것 같은 절단면의 약간 위를 쓰다듬는다.



“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일단 찾아본 대로 해보려 했는데, 영 제대로 안 돼서. 나, 손재주 없으니까 말이야.”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타이치에게 새삼스레 위화감이 느껴진다. 잠시 숨을 멈추었을 정도로 당황한 것은 맞았지만, 이대로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야마토에게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죠는 애써 자신을 다잡으며 가방 안에 넣어둔 의료용 장갑을 꺼내었다. 매, 맨 손으로 만지만 안 돼. 상, 처가 더, 덧날 수도…. 띄엄띄엄 말을 꺼내는 와중에서도 제대로 야마토의 환부를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잔인한 영화도 본 적 있었고, 집에 산처럼 쌓여있는 의료용 도서에 있는 더 징그러운 사진도 잔뜩 봤었지만 그 대상이 야마토라고 생각하니 몸이 떨릴만큼 무서웠다. 피부에 달라붙어오는 의료용 장갑을 낀 후에도 멈추지 않는 떨림에 죠는 주먹을 꾹 쥐고는 야마토의 옆에 주저앉았다. 헉, 헉, 하는 짧은 호흡이 들려온다. 다행히도, 아직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 했다. 죠가 야마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보며 타이치가 이리저리 널려있던 물건들을 하나 둘 씩 챙겨온다.



“ 뭐가 괜찮을지 몰라서 다 준비했었어. 필요하면 써도 돼.”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량의 과산화수소수, 알코올, 포바딘 같은 것들이 한 곳에 모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가져온 것보다 많은 양의 붕대와 거즈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이 상황을 예상한 것 같은 준비성에 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상황을 애써 지우려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왜 야마토가 이렇게 있는 것이며, 타이치는 여기에 있는 것일까. 왜 타이치는 이렇게도 침착하게 자신을 부른 거지? 자신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야마토의 환부를 향해 과산화수소수를 쏟아 부은 죠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 나, 나보다는 빨리 병원에 가는 편이….”


“ 가지 않아.”


“ 야마토가 위험할 수도…!”


“ 아니, 야마토는 죽지 않아.”



 어째서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거야? 하고 묻고 싶은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잘 철회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아는 타이치는 상황 판단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의대에 다다르지도 못한 그저 의대 지망인 중학생이고, 야마토는 진짜 환자다. 심지어 제대로 된 지식도 없는 자신이 보더라도 심각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환자를 대하는 것은 팔이 부러진 오가몬을 휴지로 치료해준 이후 처음이다. 그럼에도, 그 때의 자신은 생각보다 침착하게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야마토에게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아직도 거실을 보면 야마토가 누워 있던 그 때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아마 타이치는 자신이 그러한 탓으로 거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몇 번이나 타이치의 부탁으로 야마토의 집에 왔지만 그 이후로는 야마토가 거실에 누워있지 않았다.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곧바로 야마토의 침실로 걸음을 옮기면 자고 있었던 것인지 잔뜩 졸린 눈을 한 야마토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끔뻑끔뻑 졸고 있었다. 잘려있는 허벅지를 조이고 있는 붕대는 타이치가 틈틈이 갈아주고 있는지 깔끔하다. 바닥에 늘어져있는 얼룩덜룩한 붕대와 의료용 장갑, 한데 뭉쳐진 거즈를 순서대로 바라보던 죠의 얼굴이 급격이 빨갛게 물들었다. 팟,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버린 죠를 보던 타이치가 깔깔 웃으며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것을 손에 쥔다.



“ 아하하, 미안, 미안. 청소하는 걸 까먹었어.”



 깔끔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는 고무에서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희뿌연 액체가 조금 흐른다. 이런 것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의료용 장갑을 낀 죠가 야마토의 다리에 둘러져 있는 붕대를 푼다. 빨리 제대로 청소하라는 야마토의 잔소리에 타이치가 장난스럽게 받아치며 더러워진 방 안을 청소해나간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다. 야마토의 다리가 잘려진 것을 제외하면.


 처음 응급처치 후 집에 돌아가고, 자신은 필사적으로 책과 인터넷을 뒤졌다. 절단 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자신이 야마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없다는 사실에 몰려온 죄책감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음이 당연했고, 그것에 죠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음에도 그러했다. 책에서는 절단 시 환부를 피부로 감싸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지만, 그 정도까지의 기술은 죠에게 없었다. 제대로 후처리를 하지 않은 야마토의 환부에 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책을 뒤지고 있는 죠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행히도 야마토는 아직까지는 멀쩡했다. 타이치가 열심히 소독해주며 치료에 힘쓰고 있는 것을 반증하고 있기도 했고, 자신이 야매로나마 얻은 지식의 결과이기도 했다. 붕대를 풀어 외관상으로는 큰 이상이 없는 환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죠는 무거웠던 공기를 가득 내려놓을 수 있었다.



“ 그거, 나도 할 수 있는 거야?”



 확인을 마치고 나서, 절단된 부위의 구축을 막기 위해 꾹꾹 눌러 스트레칭을 해주고 있는 죠를 향해 타이치가 물었다. 청소를 끝낸 후 타이치는 감시하는 것처럼 벽에 몸을 기댄 후 자신과 야마토를 바라본다. 그 내려다보는 눈빛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타이치가 자신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열심히 따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타이치의 붕대 매는 실력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 아, 응. 여기 허벅지 앞에 근육이 짧아지기 쉬우니까 이렇게 늘려서….”


“ 응, 응.”



 천천히 설명을 시작하자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치가 오늘도 마찬가지로 평소와 같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것 마냥 무섭게 집중하는 타이치의 눈빛이 두려울 정도로 야마토의 다리를 향해 고정되어 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집착이, 죠는 손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그리고 그것의 결정체가 자신의 손이 닿아있는 이 다리다.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면 순전히 타이치만의 집착이었지만, 심지어는 그것조차 아니었다.


 야마토에게 병원에 가자고 말해본 적이 있었다. 타이치를 설득해 보자고. 이러다가 너가 어떻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이건 꼭 병원에 가야 하는 거라고. 왜 이렇게 된 것이냐고. 왜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냐고. 자신의 물음에 야마토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 내가 허락했어.”



 -하고. 얌전히 누워 있던 그 날의 야마토에게서 느낀 위화감의 정체였다. 야마토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타이치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버린 것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자신을 보며 야마토가 입술로 고운 호를 만들었다. 그의 웃음도 너무나도 평소와 같아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제 타이치에게서 도망치지 못해. 그리고, 타이치도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그게 이유야. 너무나도 덤덤히 이어지는 말에 죠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물이라도 가져오겠다며 나간 타이치가 돌아올 때까지. 당황한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타이치는 물을 야마토에게 건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다. 멀쩡한 팔으로 몸을 일으켜 물을 받아 마시는 야마토 또한 그것을 장난스럽게 받아친다.


이것 또한 너무나도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다. 야마토의 다리가 잘려진 것을 제외하면.


 그 엄청난 위화감을 죠는 얌전히 견딜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던 때, 야마토는 죠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 고 했다. 자신이 야마토의 말을 들어줄 수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죠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 외에는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심지어 그들의 부모님과 동생들조차 모르는 이 행위들을 얌전히 묵인하고 그들을 도와주며 그들이 혹시나 그들의 집착과 광기에 삼켜져 더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확인하러 오는 것 밖에 없었다.



“ 곧 여름 방학이 끝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네 아버지도 돌아오실 거야.”


“ 아, 그러네. 이제 어떻게 할까.”



 먹을 거라도 가져오겠다며 타이치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죠는 조심스레 야마토에게 말을 걸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냉정한 야마토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우리가 만났던 때처럼, 꿈만 같던 방학은 이제 끝나고 있다. 이제 그들도, 자신도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이다. 현실적으로 이 행위들을 들키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야마토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은 마냥 덤덤하게 답했다. 냉정한 야마토라면 이후의 일도 생각해 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그들은 그들 간의 집착에 몸을 맡겨버린 것이었다. 후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답지 않게.


 타이치가 디지몬 세계에서 돌아온 이후 멍하게 지내는 날이 많아졌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좋아하던 축구도 하지 않고 있다며 걱정하는 코시로의 목소리도 들었다. 그렇게 함께 지내던 디지몬들과 떨어졌으니 당연했다. 자신도 가슴 한 켠이 텅 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원했던 숙제를 하다가도 떠오르는 고마몬의 밝은 미소에 펜을 멈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야마토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그곳에서 많은 성장을 한 자신들과는 다르게 타이치는 조금 멈춰서있는 것 같았다. 가끔씩 게이트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타이치가 다시 축구를 시작하고 나서도 아마 상실감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 즈음이었다. 타이치와 야마토가 사귄다는 말을 들은 것은. 타이치가 멈춰 설 때 그를 이끌어주는 것은 항상 야마토의 몫이었다. 그 소식에 놀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둘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파국이 이것이다. 자신도, 이것을 해결할 방법 따윈 생각나지 않는다.



“ 아, 그러고 보니 말이야, 죠.”



 타이치처럼, 야마토 또한 너무나도 평소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다. 방금 자신의 물음조차 없었던 일처럼.



“ 자르기 전에, 타이치의 손이 떨렸었어. 지금의 너처럼.”


“ …….”


“ 그래서 내가 물었어. 무서워?”


“ …….”


“ 무섭지 않아, 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이 대답 말이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아? 아, 죠 너는 그 자리에 없었나.”



 자신이 모르는 일을 생각하며 야마토는 키득키득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그 표정에 죠는 다시 한 번 넋을 놓을 뻔 했다. 어떠한 상황이 다가와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 했지만, 이렇게 섬칫섬칫 느껴지는 그들의 어두운 밑면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야마토는 어딘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야마토는 쾌감마저도 느끼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하나가 된다는 거 말이야, 생각보다 엄청 기분 좋아.”



 어쩌면, 야마토는 타이치보다 더 미쳐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돌아갈게. 그…, 잘 알겠지만 야마토 붕대는 틈틈이 갈아주고. 스트레칭은 그렇게 자주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적당히 해줘.”


“ 응.”



 천천히 방문 앞을 나오는 자신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이미 타이치와 야마토는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타이치가 야마토보다 작은 체구로 그의 품에 안기면 야마토는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린다. 짧은 허벅다리로나마 어린아이처럼 허리를 감싸 안으면 타이치는 그를 가득 껴안은 채로 정말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한 채로 입을 맞춘다. 또 시작됐군. 고개를 조금 저으며 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문 잠구는거 잊지 말고! 하고 소리를 쳤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었다. 슬슬 이 장면에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도, 이러한 그들을 보고 있음에도 얌전히 어울려주고 있는 자신도, 어쩐지 그들과 비슷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면 그렇게도 무거웠던 공기가 가벼워진다.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자신에게도.

 

 




**


 

 준비물은 모두 갖추어져있었다. 결심한 이후, 둘이서 열심히 조사하고 사모은 것이었다. 야마토는 웃으며 벽에 기대어 길게 누웠다. 짧은 체육복 바지를 입고, 허옇게 드러나 있는 허벅지가 예쁘다. 타이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손을 뻗어 그것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길게 쓰다듬을 수 있는 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일 터다. 아쉬움과 기대감을 가득 담긴 손이 야마토의 허벅지 위에서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야마토의 손이 그 위로 얹힌다. 그것에 용기를 얻은 타이치는 손을 뻗어 준비해 둔 끈으로 양 허벅지를 단단히 묶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니 야마토의 미간이 움찔, 한다. 조용히 진행되는 과정이 마치 하나의 의식 같았다. 타이치가 땀 젖은 손으로 날 선 칼을 쥔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둘의 입이 열렸다.

 

 


“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

 

“ 돌이킬 생각 없어.”

 

 

 

 


 

 

 

Posted by 하리쿠
2016. 7. 1. 21:01

- 다이스케는 라멘집 아르바이트. 켄은 대학생. 동거중.

- 손풀기용 전력 60분







 시험기간이라는 선언을 한 뒤로 켄의 취침시간이 줄었다. 매 학기마다 있는 일이었지만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로 눈 밑에 시커먼 다크서클을 달고 다니는 켄의 얼굴은 보기 힘들어 다이스케는 오늘도 방문 앞에서 조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서실에서 돌아와서도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공부에 열중하는 켄을 위해 함께 쓰던 방에서 나와 부엌과 이어져있는 작은 거실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3주째이다. 그렇다는 말은, 켄의 수면부족 생활도 3주가 넘었다는 말이 된다. 걱정을 하지 않을래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깨우지 않으면 함께 밥을 먹을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재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 켄. 아침이야. 일어나자, 응?”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다가가 살짝 몸을 흔든다. 동거 초, 자신이 제대로 일자리가 잡히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정 반대였지만, 이제는 자고 있는 켄을 깨우는 것도 익숙하다. 자신의 알바처는 식재료의 운반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서, 처음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라 억지로라도 일찍 일어나는 버릇을 들였다. 처음엔 몇 번 지각도 했지만, 부랴부랴 준비하는 생활을 바꾸기 위해 아침 당번을 도맡은 지도 일 년이 넘었다. 바른 생활 청년일 것 같았던 켄이 생각보다 아침에 약하다는 것과,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억지로 먹어왔지만 사실 아침엔 입맛이 없다는 사실도 그 때가 되어서야 알았던 것 같다. 달콤한 아침잠은 잃었지만 연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안 것과, 이렇게 곤히 자고 있는 연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즐거웠기에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오늘도 시험 날이라고 했었나. 책상 위에 놓인 켄의 전공 책의 어마어마한 두께에 혀를 내두르며 다이스케는 다시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누나가 대학교에 갔을 때엔 탱자탱자 노는 것으로 보였는데, 전공이 다른 탓인지, 아니면 성실한 그의 성격 탓인지 그의 대학 생활은 전혀 달랐다. 으응, 일어 났어…. 아직 잠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린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후우, 하고 평소보다 더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이스케가 켄의 귓가에 시험에 늦겠어, 하고 속삭였다.



“ ! 다이스케, 지금 몇 시!?”



 효과는 좋았다. 단숨에 벌떡 일어난 켄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시계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다이스케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깔깔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켄이 입술을 꾹 다물고 노려본다. 지난 학기, 자신이 깨워줬음에도 불구하고 식탁 앞에서 다시 잠이 들어 전공 시험 하나를 못 볼 뻔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켄이 시험 시간에 민감한 것을 알고 친 장난이었다. 이런 장난은 그만둬, 다이스케. 잠이 싹 달아난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이는 켄을 보며 다이스케는 아직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그의 작게 삐져나온 입술에 작게 키스했다.



“ 알았어, 미안해. 밥 먹게 나와.”



 마주 닿은 입술을 떼고 눈을 마주하며 씨익 웃으면 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조금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야만다. 어찌됐건 켄은 자신에게 약했다. 그랬기에 이렇게 함께 사는 것도 그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겠지. 먼저 방 밖으로 나와 접시를 늘어놓고 있자면 책상 정리를 끝마친 켄이 약간 뻗친 머리칼을 손으로 정리하며 식탁 앞에 앉는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눌려있는 뒷머리를 귀엽다고 생각하며 다이스케는 마시기 쉽게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작게 입을 벌려 하품하던 켄이 웅얼거렸다. 아침이라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 또한 아침의 묘미 중 하나였다.



“ 잘 먹었습니다!”

“ 입가심.”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외치자 포크로 접시 위에 놓인 방울토마토 하나를 콕 집은 켄이 자신에게 내밀었다. 아침 입맛이 없다며 잘 먹지 않으려 해 과일이나 샐러드, 작은 빵 같은 것을 준비하고 있것만 그것조차 먹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애교에 다이스케는 그대로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는다. 억지로 일어나서라도 켄이 자신의 아침 식사에 어울려주는 것은 자신이 애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졸린 눈가를 비벼가며 샐러드나 작게 자른 사과를 콕콕 집어먹어주는 그의 상냥함 또한 자신은 알고 있기에 이런 애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 다녀올께!”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나가기 전, 몇 개 남지 않은 켄의 접시 위 방울토마토 하나를 더 입에 던져 넣으며 인사하자 뒤에서 잠깐, 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신발을 신고 있던 그대로 우물우물 고개를 돌리자 아까보다 좀 더 말끔한 얼굴을 한 켄이 조금 웃으며 다가온다. 다녀와, 하고 고개를 내려 자신에게 입 맞춘 켄의 입술은 방금 전까지 그가 마시고 있던 커피향이 났다. 언제나의 평화로운 아침이다.

 

Posted by 하리쿠
2016. 6. 29. 18:29

- 나홀로 전력 60분

- 타이야마님을 위한 소재는 '벽, 상흔', 중심 대사는 '네가 미안해 할거 없어. 모두 내가 한거니까.' 입니다. 씁쓸한 분위기로 연성하세요.

 

 

 




 타이치,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 없이 다정하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물음에 타이치는 무릎 사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베시시 웃었다. 복도에 위치한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은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야마토의 자취방 앞에 주저앉았을 때만해도 밖에 훤했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그저 그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대답을 바라지 않는 물음은 퍽이나 다정하다.



“ 너 기다렸지.”


“ 웃기고 있네.”



 우습지도 않다는 듯 입 꼬리를 비틀어 웃기 전, 잠시 굳은 너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해야 하는 행동은 그것을 모르는 척 자연스레 자신에게 뻗어오는 너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것 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킬 때 코끝에 스쳐지나간 너의 목덜미에서 나는 네 것이 아닌 여자 향수의 향마저 모르는 척 하며. 언제나 네가 그래왔듯이. 서로의 속마음까지 모두 다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다 비쳐 보이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자신이 일어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야마토는 바지 주머니 안에서 열쇠를 꺼내었다. 달랑거리는 야마토를 본 따 만든 인형 옆에 보지 못한 열쇠고리가 달려있었다. 여자에게 인기 많은 그의 열쇠고리가 한 두 개쯤 바뀌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었기에 하나하나 물어보기 지겹다. 어색한 손놀림으로 열쇠고리를 손바닥에 쥔 야마토가 문고리에 열쇠를 끼워 넣는다. 야마토의 손놀림이 어색하다는 것을 자신이 눈치 챈 것처럼 야마토 또한 자신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바짝 설 수 밖에 없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그를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 들어와서 물이나 한 잔 마시고 가. 손도 치료해줄 테니까.”



 철컹, 소리 내며 열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린다. 슬쩍 보이는 방 안은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언젠가 어렸던 자신이 그저 노는 것을 목적으로 야마토의 집에 즐거이 놀러갔을 때, 홀로 있던 야마토의 뒤로 보인 것처럼. 필요 없다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의 집 문을 비집고 쿵쾅쿵쾅 들어와 거실에 누워버렸던 어린 시절처럼 아무런 부담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간 세월만큼 쌓여버린 생각과 감정들이 벽처럼 자신들의 사이를 막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타이치는 어떻게 알았냐며 다시금 실실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상처가 생겨버린 주먹을 꾹 쥐었다 펴보이며.


 밖에서 닫혀있는 창문을 통해 불이 꺼져있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굳이 벨을 눌러보는 것은 버릇과 비슷했다. 어린 시절처럼 외로워 보이는, 약간의 겁을 먹은 것 같은, 그럼에도 누군가 왔다는 사실에 조금 기대해버리는 표정의 야마토가 나온다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아직도 약간이나마 남아있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미련처럼. 이제는 야마토가 집에서 홀로 밥을 먹고, 텔레비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럼에도 빠르게 가지 않는 시계를 한없이 눈으로 살피다가 차게 식어버린 이불 속에 들어가 홀로 잠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자신들 이외의 친구가 생기고 서서히 홀로 서나가는 야마토를 바로 옆에서 보고 있었음에도 그 때의 야마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아직도 어렸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 꽈악 쥔 주먹을 벽에 휘둘렀던가. 욱씬욱씬 올라오는 그 주먹의 통증에 그제야 자신이 이렇게 현재에 서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받으며 열리지 않는 문 옆에 다시금 주저앉았던가.


 자신이 이렇게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에는 열리는 그 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이 미련에 야마토는 단 한 번도 도망가려 하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부터인가 늦게 들어오는 그에게 이유를 물어본 적이 없고, 그는 기다리는 자신을 거부한 적이 없다. 자신이 그를 기다리지 않으면 반대로 그가 자신에게 찾아오기도 했다. 나의 감정과 그의 감정이 같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암묵적으로 서로 모르는 척 하기로 한 것이다.


 타이치는, 이것이 자신의 일방적인 관계였으면 했다. 얽힌 관계일수록 멀어지기 두려우니까. 언제나 자신이 이렇게 기다려야만 하는 관계가 편하니까. 문을 열어주는 야마토의 마음을 애써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조차 않았다.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인 그대로, 언제나 이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관계가 진전되지 않았으면, 했다.


 타이치는 실례하겠습니다, 하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야마토는 언제부터 그런 인사를 했냐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다. 겁쟁이들은 웃는 얼굴이다. 그리고, 겁쟁이들은 그 웃는 얼굴이 영원했으면, 하는 바보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Posted by 하리쿠
2016. 6. 28. 03:39

 켄에게 고백했다.


 더운 여름하늘, 신나게 달리느라 땀에 젖은 등판, 목구멍을 넘어가는 시원한 음료수. 뛰는 게 많이 빨라졌네, 하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너를 바라보자 그늘 안에 있는 우리들을 향해 살며시 다가오는 서늘한 바람. 흩날리는 가벼운 머리칼과 그것이 불편한지 얇은 손가락을 들어 귀 뒤로 넘기는 너의 별 의미 없는 행동. 그것들을 이유라고 들 수 없을 만큼 네가 너무나도 예뻐 바람에 흘러가듯이 좋아해, 하고 흘러넘친 감정에 이름을 붙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는 네가 예쁘다. 단정한 머리칼도, 함께 축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철의 뜨거운 태양 볕에 검게 타버린 나와는 다르게 살짝 붉어졌을 뿐 새하얀 피부도, 놀란 탓에 살짝 작아진 동공도, 그 밖의 짙은 눈동자의 색까지도 하나도 빠짐 없이 예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내 표정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웠을 것이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벌어진 입술이 꾹 닫힌다. 장난 끼 하나 없는 내 얼굴에 눈치 빠른 켄은 이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런 무드 없이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 주체할 새도 없이 넘쳐버린 감정을 어찌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응, 하고 입술도 벌리지 않은 채로 대답한 켄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놀람은 자신의 감정을 알아챈 그것이 아니다. 평범한 이성관계가 아닌 같은 것이 달린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이 저렇게 덤덤한 반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치 채고 있었구나, 내 마음을. 남의 감정에 민감하고 눈치 빠른 그가 자신의 서투른 눈속임에 넘어갈 리가 없었음을 새삼 깨달은 것 같아 다이스케는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앞에 고정한 너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꼼지락 거리는 자신의 손끝이 뭉툭하다. 등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져 순간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말 없는 너의 반응이, 아무런 대화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그 무거운 공기가 무섭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쏟아버린 물을 어찌할 수가 없다. 조금만 더 숨겨놓을 것을, 그가 모른 척 해준 그 시간들을 헛되게 하는 짓만은 하지 말 것을, 지금까지도 잘 했는데, 어째서 오늘 자신은 저질러버린 것일까. 울컥 차오르는 후회에 이를 악 문 다이스케를 향해 조용히 켄은 그래서? 하고 물었다.



“ 어?”


“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해?”



 너의 표정은 아직도 복잡하다. 얼굴만으로 남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직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친구로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 선을 넘으면 닿을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멀어져버린다. 나는 왜 켄에게 말하고야 말았을까, 대체 그에게서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보통 좋아하는 사람과 무얼 하는 것인지,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어 다이스케는 조심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켄의 시선이 한없이 진지하다. 내 표정을 살피는 듯이, 반응을 두려워하는 듯이, 조금은 기대하는 듯이, 그것을 애써 숨기려 하는 듯이 조금 흔들리던 동공이 조심히 깜빡였다.



“ …모르겠어.”



 솔직하게 대답하자 켄의 날카로운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진다. 그걸로 됐어. 예쁘게 웃으며 가볍게 일어선 켄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 집으로 가자. 아줌마께서 기다리시겠어. 너의 목소리는 어딘가 후련해보였다. 사뿐사뿐 앞으로 나아가는 네게 홀린 듯이 따라나선 내 발걸음은, 마치 진득이는 것이라도 밟은 듯이 떼는 것 하나하나가 힘들 정도다. 역시 실언을 해버렸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죄라도 지어버린 것 같아 다이스케는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시간을 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켄을 보며 호들갑을 떠는 가족들은 항상 부끄러웠지만, 오늘은 그런 분위기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놀아줘서 기쁘다고, 나도 켄처럼 축구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동시에 공부도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켄이 저녁을 먹는 내내 입 아프게 떠들어대는 엄마를 보며 다이스케는 조금 입술을 삐죽이는 것으로 그쳤다. 집에 오는 내내 켄과의 사이가 불편했다. 바로 단 둘이 되어버린다면, 자신은 그 분위기에 짓눌려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 집에 놀러왔을 때와는 다르게 능숙하게 받아치는 켄이 웃었다. 그가 그의 팬들을 대할 때 짓는 웃음이었다.



“ 나, 가서 간식이라도 가지고 올게.”



 오늘 그를 초대한 목적은 숙제의 도움을 바랬기 때문이었다. 숙제는 혼자 하는 것이라 잔소리를 하면서도 켄은 결국 자신에게 상냥했다. 자신의 상상 속 오늘은 켄과 어색하지 않은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자신은 끝까지 게으름을 피울 것이고, 켄은 그런 자신을 달래며, 때로는 조금 심술을 부리며 함께 숙제를 해 나갈 것이었다. 결국 자신은 자신을 도발하는 켄에게,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는 켄에게 넘어가 끝까지 숙제를 끝내겠지. 그리고 우리는 그 성취감에 함께 마주보며 웃을 터였다. 이렇게 내가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닌.


 자신이 들고 있는 쟁반에는 두 개의 오렌지 주스와, 쿠키가 놓여 있다. 켄에게 한 문제라도 더 배우라는 둥, 켄을 조금이라도 본받으라는 둥의 이야기를 하는 엄마에게서 팩 등을 돌려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향했지만 다이스케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조금 더 망설여야만했다. 나는 켄에게 고백을 하여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보통 고백을 하면 어떻게 되지? 연인 관계가 되나? 나는 켄과 연인 관계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켄은, 왜 그런 자신을 향해 웃었던 것일까. 온통 모르겠는 것 투성이다. 이렇게 돼서는 후에 할 공부에 집중을 할 수도-평소에도 그다지 집중을 하지는 않지만-, 켄과 함께 있는 공기에 안도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에 쥐고 있는 쟁반이 조금 떨렸다.



“ 안 들어와?”



 자신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문이 살며시 열렸다. 자신이 앞에 서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켄은 문을 채 다 열기도 전에 목소리를 그 틈사이로 흘려 넣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켄을 따라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사르르 내려앉아 있다. 그런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로 다이스케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남는 손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어. 자신이 들어도 확실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에 켄은 조용히 웃으며 그랬구나, 했다.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목소리였다.



“ 저기 말이야, 다이스케.”



 나의 오렌지 주스가 바닥을 보이고, 켄의 오렌지 주스가 반 정도 없어졌을 시점이었다. 나가서 주스를 더 받아와야 하나, 이 문제까지만 풀고 나갈까, 를 고민하고 있던 나를 켄이 조용히 불렀다. 문제를 푸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지만 정 반대로 자신은 완전히 책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애써 모든 신경을 다른 것으로 돌리려 하는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다이스케는 최대한 이 어색한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응? 아무렇지도 대답을 하자 켄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져왔다. 손끝으로 볼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켄은 조심히 자신의 고개를 그의 쪽으로 돌린다. 볼에 가해진 압력으로 켄과 시선이 마주하자 어깨가 움찔 떨렸다. 푹 내려진 시선에 켄의 노트가 보인다. 아까 전에도 저 페이지였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진도가 거의 나가있지 않다. 집중력 좋은 켄이 이럴 리가 없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그의 노트 위에 쓰여진 정갈한 글씨를 바라보는데 다시 한 번 위에서 다이스케, 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은 정말 이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는 척 하려 했다. 자신이 무심코 내뱉었던 그를 향한 감정도, 그것에 대한 그의 반응도, 그 찜찜함을 모두 모르는 척 하면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미련하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향해 답하려 벌어졌던 입이 그대로 제대로 된 단어조차 만들지 못하고 공중에서 뻐금거렸다. 뒤통수가 순식간에 바닥에 닿았음에도 아프지 않았던 것은 켄의 손이 받혀주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시야가 뒤바뀐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던 형광등의 불빛이 켄으로 인해 가려진다. 마치 커튼처럼 내려온 켄의 머리칼이 자신의 시야를 오롯이 그만을 향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잠시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눈을 끔뻑이자 고운 호를 그리고 있던 켄의 입술이 움직였다.



“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 다이스케.”



 조곤조곤 말을 전해오는 켄의 목소리가 간지럽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도망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옆에 말뚝처럼 박혀있는 켄의 팔이 단단하다. 눈을 굴려 자신이 향할 곳은 켄의 올곧은 시선밖에 없음을 알아채고 나서야 다이스케는 다시금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꿀꺽, 하고 작은 목구멍 사이로 침이 넘어갔다. 자신의 목울대가 울리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응.”


“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해?”



 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자신의 숨이 그에게 닿을까 급하게 숨을 들이쉰 다이스케가 눈을 꾸욱 감았다. 눈 깜짝할 새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제대로 이해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긴장된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그의 얼굴이, 입술 새로 조심스레 드나드는 그의 숨결이, 살짝 벌어져있을 입술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곧 닿을지도 몰라, 조금만 더 있으면. 그렇게 생각이 떠오를수록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몸과는 별개로 시끄럽게 쿵쿵 뛰어대는 심장소리가 몸 안에서 제멋대로 울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은 것을 승낙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거부하지 않은 것을 그리 생각한 것인지 가려진 시야의 위화감이 점점 다가온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입술이 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꾸욱 누르듯이 맞춰온 입술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다이스케는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치 하늘하늘 내려온 꽃잎이 자신의 입술에 스쳐지나간 것 같은 짧은 키스-라고 말하기도 애매한-였기에 기다린 시간이 무색할 정도였던 것이다. 참고 있던 숨의 탓인지, 아니면 그 잠시나마 입술이 닿았다는 사실 탓인지 얼굴에 피가 몰려 단숨에 더워졌다.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어쩐지 붉어졌을 것만 같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눈앞에는 여전히 빛을 등지고 있는 켄이 있었다. 자신은, 정말 그와 입을 맞춘 것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심히 벌어진 입술이 조금 오물거리다 닫힌다. 멍청하게 그저 켄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금 그의 입술이 휘어진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쁜 미소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자신의 위에서 일어난 켄이 한껏 내려와 있던 머리칼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긴다. 얇은 손가락 끝에 엉겨있던 가는 머리칼이 단정하게 정리되는 모습을 다이스케는 몸을 일으키며 멍하게 보고 있어야만 했다. 여전히 그 고운 미소에 눈조차 떼지 못한 채.



“ 저기, 다이스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던 얇은 손이 살포시 다이스케의 허벅지 위로 내려앉는다. 더듬는 듯이, 쓰다듬는 듯이 조금 압력을 가하여 내리누른 켄이 다이스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였다. 휘어진 눈꼬리. 조금 올려다보는 눈동자. 하얀 피부. 어깨 위에 단정하게 내려앉은 머리칼. 그리고 여전히 예쁜, 방금 전 나와 닿았던 얇은 입술. 


 어째서 켄이 자신에게 키스를 해온 것인지, 자신은 그런 그를 받아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켄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것을 전했다. 켄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왜? 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했지. 나는 무엇을 원해야만 했을까. 켄은 무슨 대답을 바랬을까. 나는, 이런 것을 바란 것일까. 이 모든 물음에 답을 내놓을 수 없었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켄이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켄에게 확실하게 홀려가고 있다.



“ 더 한 것도 할 수 있어?”



 서서히 다가오는 켄의 말에 다이스케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조금 뒤의 이야기.

 

Posted by 하리쿠
2016. 4. 2. 04:19

- 약간의 켄미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불륜 소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취향이 아니신 분들께서는 피해주세요.





 켄이 다이스케의 집으로 발을 들였을 때엔 이미 그에게는 옅게 술냄새가 나고 있었다.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는 봉지 안에 있는 것을 핑계로 여기까지 발을 옮겼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사온 것을 대충 받아든 다이스케가 말없이 작은 냉장고 안으로 그것을 넣는다. 냉장고 안에는, 아직 봉투에서 꺼내지 조차 않은 몇 개의 캔과 안주들이 이미 굴러다니고 있었다. 자신이 편의점에서 한참을 골랐던 것과 같이, 그도 아마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며 그 안을 몇 바퀴나 돌았으리라.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애써 잊어버리려는 듯이.



“ 적당히 앉아. 많이 더럽지만.”



 언제나 더럽잖아, 새삼. 익숙한 대답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곤 켄은 조용히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가 자취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히카리가 집들이 선물로 사다준 앙증맞은 방석은 이미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방 안 가득하던 다이스케의 흔적들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풍경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아 켄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씹고 있었을 오징어 다리 하나가 굴러다녔다. 다이스케는, 금방 그가 마시던 것과 살짝 다른 종류의 맥주 한 캔을 건네주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 술을 매일같이 마시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이제는 익숙한 알코올 향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불덩이라도 삼킨 것 같다.


 자신이 미야코 씨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얘기한 것과, 다이스케가 미국으로 떠나가겠다고 결정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웃어보이는 다이스케를 향해 자신은 차마 함께 웃어줄 수 없었다. 다이스케는 전부터 외국으로 나가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그를 자신이 쫓아낸 것 같은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자신에게, 다이스케가 얼마나 단단한 손으로 붙들어 주었던가. 언제까지나, 자신은 그 손의 따듯함에 기대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쭈욱.



“ 다이스케.”



 중얼거리듯 그의 이름을 부르자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침묵을 안주삼아 그저 입 안으로 술을 쏟던 다이스케의 손이 조금 멈칫했을 뿐이었다. 다이스케. 내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이름은 미련이다. 추악함이고, 더러운 집착이다. 그의 상냥함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오늘 자신을 집으로 들인 것도, 자신에게 술을 권한 것도 모두 그의 상냥함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뭐가 상냥함의 문장이야. 손 안에서 따듯하게 빛나던 그것이 아직도 제 손에 있었다면, 아주 오래전에 빛을 잃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들고 있던 맥주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다이스케에게 달려들었다. 차마 시선을 자신과 마주하지 못하고 내리깔고 있던 다이스케가 놀라 몸부림치는 것을 내리눌러 막았다. 마주한 입술 사이에서 술맛이 느껴졌다. 처음 그와 키스했을 때엔, 지금과 다르게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여 꽉 쥔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식은땀과 흥분한 공기, 귓가에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와 서로의 심장소리가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혀가 얼얼할 정도로 느껴지는 알코올의 기운이 가끔 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혀가 얼얼한 만큼, 속에서 흘러나오는 알콜 섞인 숨이 거칠어질 만큼, 점점 돌이킬 수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 …취했어? 쉬어야겠다, 너.”



 입술을 떼어내자 붉어진 얼굴을 애써 숨기며 다이스케가 어깨를 살짝 밀어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는 척 하는 것이 눈에 보여 입 안으로 살짝 웃었다.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아무 일도 없어야 했고, 아무래도 좋았다. 위에서 체중으로 누르고 있는 쪽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조금 더 내리누르자 다이스케의 표정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켄, 너…. 무어라 말을 하려는 그의 입술을 다시 한 번 자신의 것으로 막았다. 나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어, 다이스케. 술이 위 안으로 들어갈수록, 몸이 뜨거워질수록 반대로 싸늘하게 식어가는 머릿속이 신기할 정도였어. 오히려 죽을 만큼 멀쩡해서, 모두 잊고 싶었는데, 알코올로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는데 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서 비참할 지경이었어.


 아, 그래. 사실 다이스케가 방금 하려던 말이 자신이 제일 신경 쓰고 싶지 않던 것이었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 아는 지인과 머리가 돌아버릴 만큼 술을 마시면, 그러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너무나도 확연하게 남아서 결코 잊히지 않는 것이 있었다. 뇌가 녹아버릴 만큼의 쾌락으로 모든 신경을 돌려서, 잠시라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잊어버리고 싶은 것. 그렇기에 켄은 조금 더 다이스케에게 깊숙하게 입 맞추며 그의 허리를 쓸었다. 약간의 반항을 하려 꿈질거리는 다이스케는 진심으로 자신을 밀어내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에서 도망치려 하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그것을 알려주고 싶으면서도, 굳이 일깨워주고 싶지 않았기에.


 아, 그래. 내일이 자신과 미야코 씨의 결혼식이라는 것을.


 조금 더 힘을 주어 무릎으로 다이스케의 사타구니를 문지르면 아래서 참는 듯 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참지 않아도 좋아. 모두 들려줘. 먼저 유혹을 하고 있으면서도 쫓기는 것 같은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급하게 다이스케의 목덜미로 입술을 묻었다.


 나는, 최악의 쓰레기였다.

 


Posted by 하리쿠
2016. 2. 21. 21:30






 나는 잘 모르겠어. 명백하게 다음 이야기를 거절하는 그녀의 말에 다이스케는 저도 모르게 울컥한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이대로 갔다간 평소처럼 싸움이 날 것 같았기에 다이스케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자신의 말에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히카리도 그렇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던 이오리 녀석도 그렇고, 하나같이 꽉 막힌 녀석들이었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반응이라는 것이 더 짜증이 났다. 뒤에서 쫑쫑거리며 쫓아오는 치비몬의 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간 컴퓨터실의 밖에는 타케루 녀석이 있었다. 이오리 녀석보다 더 디지몬 카이저를 싫어하면 싫어했지, 덜할 녀석은 아니었으니 어짜피 반응도 비슷하겠지, 싶어 괜히 더 심술을 내며 지나쳤다.

 

 잔뜩 힘을 담아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와도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 되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냉담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적어도 히카리만은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외면하던 그녀의 살포시 내려앉은 속눈썹을 생각하며 다이스케는 괜히 분통을 가득 담아 벽을 한 번 걷어찼다. 발끝에서부터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눈물이 절로 나왔다. 얼얼한 발가락이 자신에게 바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입술을 조금 삐죽였다. 이 녀석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치죠우지 녀석에게 직접 말하는 수밖에! 가방을 고쳐 메는 다이스케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진다.

 


“ 다이스케, 어디 가려고?”

“ 이치죠우지 녀석에게!”

 


 어깨에 메고 있던 운동 가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치비몬이다. 다른 녀석이었다면 분명 자신을 막으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치비몬은 자신과 마음이 잘 맞았기 때문에 이해해 줄 것이었다. 에, 어디로? 이어지는 치비몬의 목소리에 교문을 뛰쳐나가려던 다이스케의 뜀박질이 멈칫, 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지금 이치죠우지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치비몬을 바라보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괜히 부끄러워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빽 하고 외치고는 다시 달리기에 시동을 걸었다. 타마치에 가면 어떻게든 만나겠지. 뭣하면 이치죠우지네 학교나, 멘션 앞에서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워낙 유명한 녀석이었던 터라 뉴스나 잡지만 들여다봐도 대략적인 동선 유추는 가능했다. 디지털 세계에서 돌아온 지 오래 되지 않았으니 다른 곳에는 들르지 않을 거라고 대충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고 싶어. 자신에게 반응하며 빛나는 황금의 디지멘탈이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처음 들어 올린 용기의 디지멘탈도, 자신에게 날아왔던 우정의 디지멘탈도 말을 하지는 않았기에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뇌 속으로 직접 들어오는 간절한 목소리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기적의 진화를 일으킨 디지멘탈이 찾는 사람은 그것에서 나오던 따스하고 영롱한 빛만큼 다정한 사람일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간절히 찾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치죠우지 녀석의 것이었다. 처음 녀석이 디지몬 카이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배신감에 마구마구 짜증이 났지만, 카이저의 옷을 집어던지고 혼이 나간 것 같은 녀석의 얼굴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는 물음도 진심으로 게임으로 생각했던 것 같은 녀석의 반응에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지친 표정을 짓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거야. 자신의 말을 따라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꽈악 쥔 손바닥 안에 문장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얇은 천을 넘어 서서히 스며드는 따스한 감정. 기적의 디지멘탈에서 나오던 간절히 무언가를 호소하는, 상냥하고 따듯한 온기. 그것이 진짜 이치죠우지라는,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자신도 몇 번이나 시험지에 이름을 깜빡하기도 했고, 중요한 슛을 헛발짓을 하기도 했고, 히카리의 앞에서 농구공을 얼굴로 받아내기도 했고, 실수로 창문을 깨기도 했다. 매번 실수를 하는 것은 자신이고, 그것을 용서해 주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다. 실수를 하며 자신은 시험지에 이름을 확인하고 되었고-비록 점수는 변하지 않더라도-, 슛의 정확도도 늘었고, 농구는 아직 조금 부족하지만 실수는 줄게 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치죠우지에게도 용서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이치죠우지에게 가는 이유는 충분했다.

 

 

 타마치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천천히 붉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이스케는 전에도 와 본적이 있던 이치죠우지가 산다던 멘션 앞을 서성대다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학교는 끝났을 시간이었다. 사립인 이치죠우지네 학교가 언제 마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잡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잡지에서 읽기에는 따로 하고 있는 부활동도 없다고 했으니 귀가부일테니 집으로 오는 중이겠지. 이대로 학교로 가는 길을 따라 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 꽤나 엉망인 추리였지만 서둘러 그의 학교로 향하면, 강을 따라 흐르는 길에서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소리 없이 내려앉은 저녁 같은 이치죠우지였다.

 

 그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그의 얼굴을 볼 때까지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어색함을 지우려 인사를 하고,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며 그를 불러내자 이치죠우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그 때처럼 지친 표정도, 울 것 같은 표정도, 축구를 할 때의 자신만만한 표정도 모두 지우고 있던 녀석은 입술을 꾸욱 닫고는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자신에게 닿으려다 금방 강변으로 떨어졌다. 녀석의 표정은 예전과는 다른 서늘함이 감돌고 있었다.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 또한. 멀어져가는 뒷모습은 가까웠지만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히 흐르고 있는 강변에선 자신과 이치죠우지의 사이에는 커다란 거리가 있었다. 딱 세 걸음. 그 만큼만 더 걸어가면 될 것 같았지만 온 몸으로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은 녀석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마치 자신과 그의 마음의 거리처럼.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치고 박고 싸우던 사이였기에 당연한 거리였다. 딱 세 걸음이 모자란 사이를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이치죠우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래서, 할 얘기는?”


 

 함께 축구를 하면서 들었던 자신감으로 가득한 목소리도, 디지몬들에게 명령을 하던 찢어질 것 같은 목소리도, 엎드려 절규하던 슬픔이 흘러내리는 목소리도 사라져버린 녀석은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꺼질 것 같은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서, 마음 속에 따듯하게 내려앉는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서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야. 다시 튀어나올 것 같은 물음을 억누르며 다이스케는 입 안에서 조금 말을 골랐다.

 


“ 모두와 디지몬들에게 사과해주지 않을래? 물론, 네가 그럴 생각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기회는 이쪽에서 만들어줄게. 어때? 조용히 묻는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녀석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지만 다이스케는 조금 더 강가에 시선을 집중했다. 물의 흐름을 따라 흔들리는 자신의 표정이 복잡하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놓고,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해놓고 그와 지신의 거리는 이 정도였던 것이다. 또 다시 거절당할까 무서웠다. 이치죠우지 녀석도 싫다고 한다면 그와 모두의 거리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세 걸음, 겨우 세 걸음 남았는데. 긍정하는 녀석에게 다가가도, 도저히 좁혀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 …하지만, 사과한다고 용서해줄까?”

 


 녀석의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떨어졌다. 조심스럽고, 머뭇거리는 그의 심정이 사르르 묻어난다. 표정은 바뀌지 않지만 그럼에도 보이는 감정이 안쓰럽다. 심한 짓을 했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했지. 녀석을 용서할 수 없는 다른 아이들의 감정도, 다른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치죠우지 녀석의 감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다이스케는 그를 향해 웃어줄 수 있었다. 자신이 그를 이해한 것처럼, 분명 다른 아이들도 이해해줄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조용히 내려앉은 노을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치죠우지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처럼 확연히 보이는 거리감이 싫었을까. 아니면 자신과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할까. 동료라는 자신의 말에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머리칼이 가득 퍼진 붉은 빛을 받아 하늘하늘 빛난다. 겨우 시선이 마주한다. 녀석의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쁘다. 새하얀 피부에 흘러내릴 듯이 가득 노을을 담고 있는 녀석의 놀란 얼굴은 자신과 같은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예쁘다. 어쩐지, 계속해서 시선이 가는 녀석이었다.

 


“ 미안, 그 동료에 들어가는 건 사양할게.”

 


 다시금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속삭이는 녀석의 표정에서 다시 감정이 사라졌다. 덤덤하게 강물을 바라보던 녀석이 자신이 다가가기가 무섭게 발걸음을 돌린다. 간신히 좁혔던 육체적 거리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자신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빨랐던 걸까. 조급하게 나아가던 발걸음이 자신과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자 안정된다. 견고히 쌓아올려져 있는 벽의 너머를 자신은 아직 완전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 진심으로 싸우던 상대다. 녀석은 아직 디지털 세계에 대한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자신과 선택받은 아이들에 대한 것도 알지 못했다. 뉴스에선 다시 돌아온 녀석이 몇 날 며칠이고 잠들어 있다는 소리도 했던 것 같다. 섬세함이 부족했던 걸까, 하는 후회가 조금 들었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위태한 녀석을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료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자신들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도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힘들구나, 동료라는 건.”

 


 귀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치비몬을 끌어안아주며 다이스케는 그러게, 했다. 처음엔 싸우는 것만을 생각했다. 정체를 밝혀내고 그의 야망을 막을 것이라고, 반드시 결판을 낼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다가가지 못 한 세 걸음. 그것을 좁혀나가는 것이 새로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붉어진 강물에 비친 녀석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꽈악 쥔 주먹에서 다시금 따스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이치죠우지의 진심이라고, 다이스케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리 없이 내려앉은 노을에 마음 한 편이 간지럽다. 





----------------------------------------

켄른 합작에 다이켄으로 참가했습니다.

한 달이 넘었는데도 합작이 공개되지 않아 올려봐요. 합작이 공개되면 주소 첨부하겠습니다


Posted by 하리쿠
2016. 2. 6. 01:23







 다이스케 군은 항상 타케루 군 이야기만 하는구나?

 

 모처럼 히카리와 단 둘이 하교를 하는 날이었다. 히카리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서 엄청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던 다이스케가 눈을 조금 깜빡였다. 에, 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자신이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바보같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자신의 표정을 본 히카리가 꺄르르 웃었다.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야. 살짝 앞서나가는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다이스케는 괜히 입술을 삐죽인다. 모처럼 히카리와 단 둘이 있는 시간에 타케루의 이야기를 했다니,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한 것 같았다. 좀 더 그녀에게 잘 보일만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이 자리에 없는 타케루를 마음속으로 탓하며 다이스케는 다시금 히카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점심시간에 한 축구에서 골을 넣은 이야기, 오후 수업이 졸렸던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아까 전 히카리가 자신에게 한 말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타케루 녀석의 이야기만 한다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득도 없는 녀석의 이야기만 한단 말인가. 공부도 자신보다 더 잘 하고, 축구는 내가 더 잘하지만 농구라던가 다른 쪽 운동은 운이 좋아서 점수를 더 잘 받고(절대로 시험 날 타케루 녀석이 운이 좋았고, 자신이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다이스케는 믿고 있다), 여자애들의 인기만 독차지하고, 특히 히카리의 관심을 고마운지도 모르고 받고 있는 녀석을! 아무리 수업 시간에 조용히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뒤통수를 노려봐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다이스케는 어쩐지 심통이 나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집중을 하지 않는다며 선생님께 교실 뒤로 나가 있으라는 벌을 받게 되었을 때, 자신을 바라보며 작게 웃는 녀석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여담이었다.

 


“ 다이스케는 항상 타케루 군의 험담만 하잖아?”

 


 질투쟁이. 가볍게 덧붙인 미야코가 컴퓨터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자신을 살짝 흘겨본다.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는 것을 봐서는 그녀도 자신에게 심술을 내고 있을 뿐인 것 같았지만, 다이스케는 고개를 픽 돌리며 질투쟁이라 미안하다! 한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머릿속에서 타케루 녀석에 대한 것이 사라지지 않아서 다른 녀석들에게도 물어보기 위해 종례가 끝나자마자 컴퓨터실로 달려왔다. 하필 있던 사람이 미야코였기에 조금 망설였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심술이 잔뜩 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다른 녀석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오리 녀석일지라도 비슷한 대답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곧 뒤따라왔다. 대체 뭘 잘못했다고 주변에 적 밖에 없는 것인지 괜시리 짜증이 났다.

 

 아, 됐어! 돌아갈래! 괜히 잔뜩 짜증을 잔뜩 담아 외치며 쿵쾅쿵쾅 뒷문으로 향한다. 뒤에서 어디 가냐는 미야코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일부러 흥! 하고 외치며 무시했다. 자신이 화가 난 이유가 그녀의 탓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다른 녀석들이 오기 전에 머리나 식힐 심산으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뒷문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드르륵, 하고 문이 먼저 열렸다. 아, 젠장. 제일 보기 싫은 순간에 제일 보고 싶지 않은 녀석이 눈앞에 나타나고 난리다.

 


" 다이스케 군? 한참 찾았잖아. 먼저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

“ 내버려둬!”

 


 확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소리를 지르고 나니 또다시 심술을 부려버렸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뭐야, 그렇게 말 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타케루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됐어, 하고 걸음을 옮긴다. 자신을 지나쳐간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차마 잡을 수 없어 다이스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녀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하고 싶은 말도, 감정도, 표현도 모두 숨긴 채로 혼자 납득해버린다. 순간순간 느낀 것을 바로 표현하는 자신과는 정 반대인 그의 모습에 항상 짜증이 났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되잖아. 타케루 녀석의 뒤에서 들어오던 히카리와 자신의 뒤에 있던 미야코가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꽈악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녀석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디지털 세계에 가서도 타케루와의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을 배려하여 괜히 이오리, 히카리와 같은 팀이 되겠다며 먼저 가버린 미야코도, 어둠의 탑에 협공을 날리는 화염드라몬과 페가수스몬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잔뜩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모르는 호크몬과 아르마지몬의 등을 쭉쭉 밀어대는 미야코의 뒷모습을 보며 타케루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이 싸우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차라리 평소처럼 내버려 뒀으면 좋았을 것을. 둘만 남게 되는 것은 역효과인 것도 모르고.

 

 큰 소리를 내며 쓰러져가는 어둠의 탑을 바라보는 타케루 녀석의 표정엔 색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 어째서 자신은 그렇게도 타케루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잘난 녀석에게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에? 히카리와 친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속을 알 수 없는 건 어떤 사람이나 똑같은데, 왜 하필 타케루 녀석만?

 

 어둠의 탑을 쓰러뜨렸다며 칭찬해 달라는 듯이 안겨오는 파닥몬을 끌어안은 타케루 녀석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해냈구나, 다이스케 군. 평소와 다름없이 미소 짓는 녀석의 표정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 도대체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내 마음속처럼. 왜, 하필 타케루 녀석만? 마치 딱 달라붙은 것 같은 입술을 간신히 떨어뜨리며 다이스케는 그래, 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다.

 

 


“ 나 잠시 교실에 올라갔다 올게. 먼저 가.”


 

 다 같이 학교를 빠져나왔을 때 즈음이었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멈추어 선 타케루가 숙제를 놓고 와서,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 수학 숙제가 있었던가. 교실의 뒤에 나가 서있으면서도 여전히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아 선생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은 탓인가 숙제의 유무자체도 가물가물하다. 만약 있어도 그 전 쉬는 시간에 풀거나 제대로 풀어가지 않아 혼나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다이스케와 다르게 타케루는 성실하게 숙제를 해가고는 했다. 과연 인기 많고 공부 잘하는 이케맨이라는 건가. 여전히 삐딱한 생각만 차오른다.

  


“ 나도 같이 가, 타케루 군.”

“ 앗, 나도!”

 


 히카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외친 다이스케가 학교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히카리가 간다고 하기에 자동 반사적으로 같이 가겠다고 한 것이었지만 또다시 녀석에게 질투를 해버렸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하지만 타케루 녀석과 히카리를 단 둘이 보내기는 싫다는 마음이 더 컸기에 다이스케는 재밌다는 듯이 웃는 타케루의 얼굴을 조금 노려볼 뿐이었다. 복잡한 자신의 속도 모르고, 언제나와 같은 반응.

 

 잠깐, 히카리. 짧게 외치며 미야코가 학교로 향하려던 히카리의 손을 잡는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미야코와 시선을 마주하던 히카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뱉었다.

 


“ 오늘 미야코 언니랑 약속이 있었어. 미안해, 타케루 군! 다이스케 군과 같이 다녀와!”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히카리와 미야코가 꺄르르 웃으며 이오리까지 데리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삐삐몬이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버린 미야코가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같이 가겠다는 이유가 뭐였는데! 뒤도 보지 않고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이스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고개가 푹 숙여진다. 옆에서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아하하, 하고 웃던 타케루가 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번 따라가겠다고 말한 이상 히카리가 가버렸다고 해서 철회할 수는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르던 다이스케의 발걸음이 힘이 빠져 터벅터벅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내내 타케루와 자신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괜히 어색한 마음에 쳇, 이라던가 히카리랑 가고 싶었는데, 따위의 볼멘소리를 중얼거렸지만 앞서가는 타케루에게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진심이 아니었는데. 물론 히카리와 함께 가는 것을 원했던 것은 맞지만 타케루 녀석과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는 다시 입술을 삐죽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는 타케루 녀석이 마치 전염되어 온 것 같았다.

 


“ 다이스케 군.”

 


 타케루가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며 다이스케는 삐딱하게 교실 벽에 기대어 섰다. 그의 자리 앞에 서는 것까지 흘끗대다 시선을 창밖으로 옮긴다. 당번이 닫는 것을 깜빡했는지 열려있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디지털 세계에서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밖이 어둡다. 집에 돌아가면 밤이 되겠지, 저녁 먹기 전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나도 숙제 할 공책이나 들고 갈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흘러가는 붉게 물든 구름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팔짱을 끼고 있던 다이스케가 창밖을 보던 그대로 눈동자만 굴려 타케루를 바라본다. 한 쪽 손에 노트를 쥐고 있던 타케루가 자신을 보고 있다. 그의 뒤에서 커튼이 조금 흩날렸다.

 


“ 내가 싫다면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

 

 

 교실 안에 노을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확산된 빛에 물들어가는 교실이 붉다. 작은 바람이 미아처럼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 조금 사각거리는 얇은 금색 머리칼을 하고, 하얀 피부를 노을로 물들이고 있는 타케루의 표정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조금 슬퍼 보인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어 오물거리던 입술이 꾸욱 닫힌다. 입 안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복잡한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고개를 조금 숙인 타케루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평소처럼 웃었다. 노을이 반짝였다. 교실바닥과 실내화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자신은 타케루 녀석이 싫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공부를 잘 하는 녀석도, 운동을 잘 하는 녀석도, 심지어 축구를 잘 하는 녀석도 한참은 있다. 인기가 많은 녀석도 있다. 물론 자신과 같은 나이 중에서 히카리와 녀석만큼 친한 남자애는 없었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더 히카리와 친해지면 되는 것이다. 그럴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심술을 내는 것은, 그러니까, 타케루 녀석이 옆에 있으니까. 자꾸 시선이 가서, 녀석이 자꾸만 보이니까,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사실 숨겨오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내비쳐 보이기도 부끄럽고, 심지어는 마주하기조차 민망해서. 자신의 마음을 자신조차 알 수 없어서.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타케루의 걸음걸이가 빠르다. 또 다시 녀석을 잡을 틈도 없이 옆모습만 바라보는 것은 싫었다. 대체 왜 녀석에게만 관련되면 감성적이 되는 것인지, 괜히 무언가 막혀 있는 것처럼 속이 답답해지는 것인지, 자꾸만 시선 끝에 녀석이 걸리는 것인지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지나치려는 녀석의 흔들리는 손목을 재빨리 잡아챘다. 한 손 가득히 들어오는 손목. 몸을 돌리자 조금 놀란 눈을 한 타케루와 시선이 마주쳤다. 커튼이 거칠어지는 바람에 이리저리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또 다시 소리를 질러버리는 자신이 싫었지만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막혀있던 댐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이라는 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자신에게 몰아치고 있었다. 자신은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11년밖에 살지 않은 자신은, 이것이 어떠한 감정인지조차 정의하지 못하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지 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그를 그냥 보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닿아온 손목에서 두근, 두근 하는 맥박 소리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순간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 …네가 싫지 않아.”


 

 꽉 쥐었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한참을 말을 골랐지만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이 가득 묻어나온 그 말은 매우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얼굴까지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힘 빠진 손에서 타케루의 손목이 빠져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타케루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 그의 대답을 듣기조차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었다. 스읍, 하고 그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리기 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다.

 


“ ……응.”

 


 타케루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귀 속에 확실히 박혀 들어왔다. 손목이 빠져나간 손바닥 안에서 그의 온기가 두근거리고 있었다. 대체 이 두근거림을 무어라 설명해야할 것인지, 다이스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잦아들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

디지몬 다이타케 합작 [그 날의 우리]에 소학생 버전으로 참여했습니다

합작은 이쪽-> http://moment0710.tistory.com/notice 에서 감상해주세요


 

'디지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켄] 최악의 쓰레기  (0) 2016.04.02
[합작/다이켄] 켄른 합작  (0) 2016.02.21
[오사켄] 나츠마츠리  (0) 2016.02.05
[타이야마/R19] 건방진 고양이를 길들이는 방법  (0) 2016.01.17
[타케켄] 립스틱  (0) 2016.01.10
Posted by 하리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