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1. 21:30






 나는 잘 모르겠어. 명백하게 다음 이야기를 거절하는 그녀의 말에 다이스케는 저도 모르게 울컥한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이대로 갔다간 평소처럼 싸움이 날 것 같았기에 다이스케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자신의 말에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히카리도 그렇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던 이오리 녀석도 그렇고, 하나같이 꽉 막힌 녀석들이었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반응이라는 것이 더 짜증이 났다. 뒤에서 쫑쫑거리며 쫓아오는 치비몬의 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간 컴퓨터실의 밖에는 타케루 녀석이 있었다. 이오리 녀석보다 더 디지몬 카이저를 싫어하면 싫어했지, 덜할 녀석은 아니었으니 어짜피 반응도 비슷하겠지, 싶어 괜히 더 심술을 내며 지나쳤다.

 

 잔뜩 힘을 담아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와도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 되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냉담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적어도 히카리만은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외면하던 그녀의 살포시 내려앉은 속눈썹을 생각하며 다이스케는 괜히 분통을 가득 담아 벽을 한 번 걷어찼다. 발끝에서부터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눈물이 절로 나왔다. 얼얼한 발가락이 자신에게 바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입술을 조금 삐죽였다. 이 녀석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치죠우지 녀석에게 직접 말하는 수밖에! 가방을 고쳐 메는 다이스케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진다.

 


“ 다이스케, 어디 가려고?”

“ 이치죠우지 녀석에게!”

 


 어깨에 메고 있던 운동 가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치비몬이다. 다른 녀석이었다면 분명 자신을 막으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치비몬은 자신과 마음이 잘 맞았기 때문에 이해해 줄 것이었다. 에, 어디로? 이어지는 치비몬의 목소리에 교문을 뛰쳐나가려던 다이스케의 뜀박질이 멈칫, 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지금 이치죠우지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치비몬을 바라보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괜히 부끄러워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빽 하고 외치고는 다시 달리기에 시동을 걸었다. 타마치에 가면 어떻게든 만나겠지. 뭣하면 이치죠우지네 학교나, 멘션 앞에서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워낙 유명한 녀석이었던 터라 뉴스나 잡지만 들여다봐도 대략적인 동선 유추는 가능했다. 디지털 세계에서 돌아온 지 오래 되지 않았으니 다른 곳에는 들르지 않을 거라고 대충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고 싶어. 자신에게 반응하며 빛나는 황금의 디지멘탈이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처음 들어 올린 용기의 디지멘탈도, 자신에게 날아왔던 우정의 디지멘탈도 말을 하지는 않았기에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뇌 속으로 직접 들어오는 간절한 목소리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기적의 진화를 일으킨 디지멘탈이 찾는 사람은 그것에서 나오던 따스하고 영롱한 빛만큼 다정한 사람일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간절히 찾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치죠우지 녀석의 것이었다. 처음 녀석이 디지몬 카이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배신감에 마구마구 짜증이 났지만, 카이저의 옷을 집어던지고 혼이 나간 것 같은 녀석의 얼굴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는 물음도 진심으로 게임으로 생각했던 것 같은 녀석의 반응에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지친 표정을 짓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거야. 자신의 말을 따라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꽈악 쥔 손바닥 안에 문장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얇은 천을 넘어 서서히 스며드는 따스한 감정. 기적의 디지멘탈에서 나오던 간절히 무언가를 호소하는, 상냥하고 따듯한 온기. 그것이 진짜 이치죠우지라는,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자신도 몇 번이나 시험지에 이름을 깜빡하기도 했고, 중요한 슛을 헛발짓을 하기도 했고, 히카리의 앞에서 농구공을 얼굴로 받아내기도 했고, 실수로 창문을 깨기도 했다. 매번 실수를 하는 것은 자신이고, 그것을 용서해 주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다. 실수를 하며 자신은 시험지에 이름을 확인하고 되었고-비록 점수는 변하지 않더라도-, 슛의 정확도도 늘었고, 농구는 아직 조금 부족하지만 실수는 줄게 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치죠우지에게도 용서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이치죠우지에게 가는 이유는 충분했다.

 

 

 타마치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천천히 붉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이스케는 전에도 와 본적이 있던 이치죠우지가 산다던 멘션 앞을 서성대다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학교는 끝났을 시간이었다. 사립인 이치죠우지네 학교가 언제 마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잡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잡지에서 읽기에는 따로 하고 있는 부활동도 없다고 했으니 귀가부일테니 집으로 오는 중이겠지. 이대로 학교로 가는 길을 따라 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 꽤나 엉망인 추리였지만 서둘러 그의 학교로 향하면, 강을 따라 흐르는 길에서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소리 없이 내려앉은 저녁 같은 이치죠우지였다.

 

 그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그의 얼굴을 볼 때까지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어색함을 지우려 인사를 하고,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며 그를 불러내자 이치죠우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그 때처럼 지친 표정도, 울 것 같은 표정도, 축구를 할 때의 자신만만한 표정도 모두 지우고 있던 녀석은 입술을 꾸욱 닫고는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자신에게 닿으려다 금방 강변으로 떨어졌다. 녀석의 표정은 예전과는 다른 서늘함이 감돌고 있었다.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 또한. 멀어져가는 뒷모습은 가까웠지만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히 흐르고 있는 강변에선 자신과 이치죠우지의 사이에는 커다란 거리가 있었다. 딱 세 걸음. 그 만큼만 더 걸어가면 될 것 같았지만 온 몸으로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은 녀석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마치 자신과 그의 마음의 거리처럼.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치고 박고 싸우던 사이였기에 당연한 거리였다. 딱 세 걸음이 모자란 사이를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이치죠우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래서, 할 얘기는?”


 

 함께 축구를 하면서 들었던 자신감으로 가득한 목소리도, 디지몬들에게 명령을 하던 찢어질 것 같은 목소리도, 엎드려 절규하던 슬픔이 흘러내리는 목소리도 사라져버린 녀석은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꺼질 것 같은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서, 마음 속에 따듯하게 내려앉는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서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야. 다시 튀어나올 것 같은 물음을 억누르며 다이스케는 입 안에서 조금 말을 골랐다.

 


“ 모두와 디지몬들에게 사과해주지 않을래? 물론, 네가 그럴 생각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기회는 이쪽에서 만들어줄게. 어때? 조용히 묻는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녀석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지만 다이스케는 조금 더 강가에 시선을 집중했다. 물의 흐름을 따라 흔들리는 자신의 표정이 복잡하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놓고,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해놓고 그와 지신의 거리는 이 정도였던 것이다. 또 다시 거절당할까 무서웠다. 이치죠우지 녀석도 싫다고 한다면 그와 모두의 거리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세 걸음, 겨우 세 걸음 남았는데. 긍정하는 녀석에게 다가가도, 도저히 좁혀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 …하지만, 사과한다고 용서해줄까?”

 


 녀석의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떨어졌다. 조심스럽고, 머뭇거리는 그의 심정이 사르르 묻어난다. 표정은 바뀌지 않지만 그럼에도 보이는 감정이 안쓰럽다. 심한 짓을 했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했지. 녀석을 용서할 수 없는 다른 아이들의 감정도, 다른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치죠우지 녀석의 감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다이스케는 그를 향해 웃어줄 수 있었다. 자신이 그를 이해한 것처럼, 분명 다른 아이들도 이해해줄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조용히 내려앉은 노을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치죠우지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처럼 확연히 보이는 거리감이 싫었을까. 아니면 자신과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할까. 동료라는 자신의 말에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머리칼이 가득 퍼진 붉은 빛을 받아 하늘하늘 빛난다. 겨우 시선이 마주한다. 녀석의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쁘다. 새하얀 피부에 흘러내릴 듯이 가득 노을을 담고 있는 녀석의 놀란 얼굴은 자신과 같은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예쁘다. 어쩐지, 계속해서 시선이 가는 녀석이었다.

 


“ 미안, 그 동료에 들어가는 건 사양할게.”

 


 다시금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속삭이는 녀석의 표정에서 다시 감정이 사라졌다. 덤덤하게 강물을 바라보던 녀석이 자신이 다가가기가 무섭게 발걸음을 돌린다. 간신히 좁혔던 육체적 거리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자신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빨랐던 걸까. 조급하게 나아가던 발걸음이 자신과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지자 안정된다. 견고히 쌓아올려져 있는 벽의 너머를 자신은 아직 완전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 진심으로 싸우던 상대다. 녀석은 아직 디지털 세계에 대한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자신과 선택받은 아이들에 대한 것도 알지 못했다. 뉴스에선 다시 돌아온 녀석이 몇 날 며칠이고 잠들어 있다는 소리도 했던 것 같다. 섬세함이 부족했던 걸까, 하는 후회가 조금 들었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위태한 녀석을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료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자신들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도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힘들구나, 동료라는 건.”

 


 귀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치비몬을 끌어안아주며 다이스케는 그러게, 했다. 처음엔 싸우는 것만을 생각했다. 정체를 밝혀내고 그의 야망을 막을 것이라고, 반드시 결판을 낼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다가가지 못 한 세 걸음. 그것을 좁혀나가는 것이 새로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붉어진 강물에 비친 녀석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꽈악 쥔 주먹에서 다시금 따스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이치죠우지의 진심이라고, 다이스케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리 없이 내려앉은 노을에 마음 한 편이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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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른 합작에 다이켄으로 참가했습니다.

한 달이 넘었는데도 합작이 공개되지 않아 올려봐요. 합작이 공개되면 주소 첨부하겠습니다


Posted by 하리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