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31. 04:34

천천히 잠에서 깨었을 때엔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시트와 이불이었지만 켄은 이 침대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조금 더 이불 속으로 넣으며 움직이자 엉덩이 쪽에서 아릿한 둔통이 올라온다. 찝찝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오늘 타카이시 군이 콘돔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타카이시 군은 행위가 끝난 후 뒷정리 같은 귀찮은 것을 해주지 않는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찝찝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잠에 들기 위해 뒤척이는데, 이치죠우지 군,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 꺼져있는 책상 쪽에서이다.



있었다면 인기척 정도는 내 줬으면 하는데.”


그 정도는 알아서 느끼라구.”



 자신이 이불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서야 책상 위에 놓여진 스탠드를 켠 타카이시 군이 자신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 했다. 자고 있는 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니 취미가 나쁘다. 자신이 일어난 것을 눈치 채고 나서도 인기척을 내지 않은 것도, 자신이 다시 잠이 들려 할 때 방해하듯이 이름을 부른 것도 일부러 였을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것이 그다워 켄은 잠자코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그가 굳이 다시 자려는 자신을 부른 것은 자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질렸기 때문일 테니까. 천천히 침대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카이시 군이 그가 마시고 있던 컵을 자신에게로 내민다. 켄은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고, 그 컵을 받아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데운 우유였다. 이 또한 일부러 일 테다.



저녁 먹고 갈래? 편의점 음식이지만.”


먹고 싶지 않아.”



 아, 그래. 가볍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타카이시 군은 닫혀있는 방문을 연다. 단번에 쏟아진 거실의 불빛에 켄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에게 물어본 말은 아마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이인분의 음식을 데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먹겠다고 해도 가볍게 답을 하고는 그제부터야 무엇을 먹일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고, 아마 지금 같은 기분 나쁜 웃는 표정을 하고는 저녁을 먹는 자신을 압박하듯이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우유부터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일 테니까.


 켄은 먼저 나가버린 타케루를 바라보며 바닥을 향해 발을 내렸다. 깔끔하게 접혀져 있는 자신의 옷이 놓여있다. 방금 전까지 따듯한 이불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춥지는 않았지만 켄은 간단히 속옷과 바지만을 입고 방 밖으로 나선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다리로 방사통이 이어졌지만 이 또한 익숙한 통증 중 하나였다. 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손에 들려있던 컵을 내려놓는다. 당연하게도 한 입도 대지 않았다. 자신의 불편한 걸음을 감상하듯 탁자에 앉아있던 타카이시 군이 그 안으로 조금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날카로워진 시선을 받으며 켄은 다른 컵에다 냉장고에 있던 냉수를 따른다. 불쾌해 보이는 저 표정과 시선이 만족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벌써 저녁 시간대네. 자신이 타카이시 군의 집에 들어온 것은 분명 학교가 끝난 직후였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잤다고 생각하며 켄은 베란다의 문을 연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아직 덜 깬 자신을 깨워주는 것 같았다. 꽉 막혀 질식할 것 같이 무거운 집 안의 공기보다는 훨씬 낫다. 자신이 오래 자버린 것은 그가 무리를 시켜서 일 것이다. 자신을 미묘하게 불쾌하게 만드는 엉덩이 쪽의 통증도, 기운이 나지 않는 나른한 기분도, 순식간에 없어져버린 자신의 느긋한 저녁 시간이 사라져버린 이유도 모두 그였다. 불쾌한 기분이 올라온다. 그리고, 이 기분을 표출할 수 있는 상대는 자신의 앞에 있었다.



타카이시 군.”



 컵에 든 냉수를 모두 입 안으로 털어 넣은 켄이 타케루를 향해 몸을 완전히 돌리며 그를 부른다. 자신이 걸어가는 것도, 서늘함에 몸을 조금 떠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천천히 베란다로 보이는 아래를 바라보는 것도 마치 텔레비전 브라우관 속에서 펼쳐지는 쇼를 보는 것 같이 그저 방관자처럼 보고 있던 타카이시 군이 새삼 눈을 어린 아이처럼 뜨고 깜빡인다. 그는 자신이 그를 부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켄은 베란다의 난간에 편하게 몸을 기대어 섰다. 이 위치라면 밖에서는 자신이 완전하게 보일 것이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면, 그 마저도.


 저녁 시간이 되어간다는 것은 검도를 하기 위해 밖에 있던 이오리 군이 돌아온다는 소리다. 일을 하는 식구들을 위해 다른 집안보다 조금 저녁 식사를 일찍 시작하는 미야코 씨가 편의점의 다른 가족들을 부르려 나올지도 모른다. 히카리 씨는 저녁 식사 전에 미야코 씨의 편의점에서 그녀가 추천해 준 물을 사가곤 했었다. 그런 히카리 씨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이스케 또한 그녀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위해 미야코 씨의 편의점 앞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렇게 타카이시 군이 사는 멘션 앞을 지나가게 된 그들이 그다지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와 그가 키스라도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 좋은 타카이시 군은 어떻게 그 상황을 수습하려 애쓸까. 그 사람 좋은 타카이시 군이, 사실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보고 있는 외면의 타카이시 군은 사실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고, 제일 친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자신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평생 모른 채로 살아갈까.


 켄은 타케루를 향해 손짓한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한 제일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부르면 분명 타카이시 군은 자신의 의도를 바로 눈치 챌 것이다. 그와 자신은 정말 비슷한 면이 있어서, 서로의 생각 따윈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쪽의 목적이 그저 상대를 불쾌하게 하기 위한 종류의 것이면 더더욱. 그리고 상냥하고, 온화한 우리는 이런 것을 표출할 상대가 서로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심술을 받아주는 것처럼, 타카이시 군도 분명 모든 의도를 파악하고 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줄 것이다.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난 성격 나쁜 이치죠우지 군이 제일 좋아.”


나도.”



 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온 타카이시 군을 마치 연인처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켄의 의도에 넘치게 응하려 타케루는 그의 남색 머리칼을 휘어잡는다. 강제로 키스하는 듯이 켄의 고개를 억지로 꺾고, 입술을 잡아먹을 듯이 가득 삼킨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켄이 밖으로 떨어질 듯 몸을 휘청거렸다. 마치 이대로 떨어지고 싶은 듯 했다. 우연을 가장하여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은 듯도 했다. 그런 긴장감과 스릴감. 좀처럼 표출하지 못했던 내면의 못된 마음들을 가득 담아 타케루와 켄은 서로의 입술에 매달렸다.


그들은 이것을 애정이라고 불렀다.

 


Posted by 하리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