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4. 02:25


 

 

 

 형이 죽었다. 아직 어린 켄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형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라는 마음은 어린 생각으로도 나쁜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은 지워지지 않는 깊은 흉터처럼 따라왔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무엇보다 찐덕찐덕한 오물처럼 털어내려 해도 결코 털어낼 수 없다는 것을 어린 켄에게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메일로 인해 보이지 않게 대충 밴드를 붙인다고 해도, 그럼에도 흉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집에는 형의 사진이 많았다. 걸려있는 오사무 형의 액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쏟아졌다. 눈을 어디로 돌리던 형의 얼굴이 보여서, 그것으로 인해 슬퍼진 엄마께서 몇 개를 치우긴 했지만, 그래도 보였다. 형을 볼 때마다 바닥에서 진흙으로 된 손들이 튀어나와 다리를 붙잡는 느낌이었다. 기분 나쁜 손가락들이 피부에 치덕치덕 닿았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느 날, 학교에 가서 별로 들을 필요도 없는 수업을 듣고 왔을 때, 엄마가 잡지 하나를 나에게 보여줬었다. 내 사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자신을 붙잡는 기자라고 추정되는 남자의 수준 떨어지는 질문에 몇 개 대답을 해 준적이 있었다. 그 때 사진도 몇 장 찍힌 것이리라. 잡지를 손에 들고 있는 여자는 기뻐보였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형의 사진 옆에 내 사진이 놓인 것이 보였다. 옆에는 그녀가 스크랩 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신문과 잡지들이 보였다. 온통 내가 나와 있는 것들이었다. 왠지 몰라도 짜증이 치밀어 그녀가 내미는 잡지를 손으로 쳐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이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냐며 달려드는 급우들. 그 뒤의 부러움과 시기, 질투가 섞인 시선들. 천재라며 카메라를 들이미는 어른들과 입에 발린 칭찬을 하는 동네 아줌마들. 그리고 그것에 우쭐해 하며 신이 난 부모. 모두 하찮은 인간들이었다. 형도 똑같이 당했고, 똑같이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벌레 같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천재적인 나와 맞지 않다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내 힘으로 바꾼 디지바이스가 생각났다. 메일은 디지털 세계를 ‘나와 어울리는 세계’라고 칭했다.

 

 

 아아, 이제야 알았다. 시시한 인간들이 사는 세계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 나와 어울리는 세계로 가서, 그곳에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메일을 보낸 자가 거는 게임일지도 몰라. 내가 그 세계를 지배하는 황제가 될지, 되지 못할지에 대한.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 도착한 곳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작은 디지몬이 보였다.

 

 

" 켄쨩…?"

" 난…. 디지몬 카이져다."

 

 

 오사무가 죽은지, 약 1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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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몬 글 합작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에 이치죠우지 켄으로 참여했습니다

합작은 이쪽-> http://blog.naver.com/2___bbbb/150190316067 에서 감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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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리쿠
2014. 6. 4. 02:22


 

 

 8월 1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타이치 씨들이 처음으로 디지털 세계에 갔을 때의 날짜라고 했다. 그들이 갔을 때 이후로 매년 돌아오는 8월 1일마다 그 때 선택받은 아이들은 모여서 그 당신의 일을 회상했고, 다이스케와 자신들이 디지털 세계로 가면서 그 멤버에 추가되었다. 처음 그들의 모임-이라고 부르면 이상하지만-에 초대되었을 때엔 내가 그 곳에 가도 되는지, 그들 사이에 껴도 괜찮은지 고민했었다. 애초에 자신이 처음 디지털 세계에 갔던 날짜는 8월 1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8월 1일은 아무런 날도 아닌 것이다.

 

 상관없잖아. 나도 8월 1일이 아니었고, 미야코나 이오리도 마찬가지니까! 망설이고 있는 자신에게 올 것을 제안한 다이스케가 말했었다. 굳이 자신의 집까지 찾아와서 말을 해 준 다이스케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보였기에 켄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그날 밤, 자신이 정말 그들의 모임에 참가해도 되는 것인지, 자신에게 정말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지 고민하던 켄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웜몬을 안고 잠에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아무도 타락했던 자신의 얘기를 꺼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자신을 생각해서 일부러 화제를 피해준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그 때 처음 타이치들이 디지털 세계를 구했을 때의 얘기를 들었다. 재밌었지? 켄쨩. 집으로 돌아오는 길 품속에서 들려오는 웜몬의 물음에 켄은 더 꼭 안아주는 것으로 답했다.

 

 

 그 뒤로도 8월 1일은 특별한 날이다.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선택받은 아이들이 커갈수록 서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기에, 그 날이 매우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동네도 달라 학교가 같을 수 없는 켄은 다른 아이들을 보려면 굳이 하루를 내야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만나서, 그동안 있었던 일이나 그 때의 회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 때를 떠올리면 허무하고 씁쓸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맞았다. 은퇴한 영웅은 외로운 법이었다. 그렇게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얘기는 다들 성인이 되고 술이 들어가자 입으로 나왔다. 누가 처음 말을 꺼냈는지는 모를 만큼 취어있을 때 즈음이었다. 다들 그 얘기에는 공감하는 듯해서 켄은 괜히 동질감을 느꼈다.

 

 

“ 켄은 싸움이 좋은 거야?”

 

 

 켄은 그나마 덜 취한 쪽에 속했기에 많이 마신 다이스케와, 술에 약한 죠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 택시에 태워 보내고, 머리 좀 식힐 겸 산책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일부러 가지고 나온 커다란 가방 속에 숨어있던-날이 어두웠기에 반쯤 열어두고 있었다- 웜몬이 한참을 뜸들이더니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아마 아까 나온 주제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차마 다들 공감하던 와중에 물어볼 수는 없고, 그럼에도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결국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이리라. 여름의 밤 치고는 꽤나 시원한 바람이 뜨거워진 얼굴을 식혔다. 속에서 잠들어있던 뜨거운 숨을 푸하, 하고 내어놓자 썩 좋아하지 않는 알코올의 맛이 느껴졌다. 웜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위장에서 알코올의 맛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 아니이-. 그건 아니야.”

 

 

 취해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늘어져서 나왔다. 그게 아니라, 나와 다이스케들은 세상을 구한 거잖아. 그치? 다들 정말 노력했었지. 그러니까 그리운 거야.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대답할 말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아마 웜몬은 횡설수설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거라고 제대로 생각했지만, 입에서는 아무렇게나 짝지어진 말들이 튀어나왔다. 어렸을 때의 나는 세상을 구했단 말이야.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근데 지금의 나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잖아. 그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는 말이야. 전에는 자주 만났던 다이스케도, 타케루도, 히카리도, …미야코 씨도, 이오리도 제대로 못 만나고…. 그리고…….

 

 하아…, 내가 뭐라고 하려 했더라…….

 

 

“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한참을 할 말을 찾지 못하며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자 웜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고 바르게 섰다. 여름 밤하늘에 하얀 구름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이것만큼은 대답이 확실하게 나왔다. 방황하고 확신이 없던 시절의 기억은 썩 좋지 못했다. 데빌몬의 영향으로 어두운 곳에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어서,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면 여김 없이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동료가 되자며 끌어들이는 다른 선택받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예삿일이었고, 그동안 해온 일에 대해 생각을 할 때면 꿈에서조차 쉴 수 없었다.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디지몬들을 멋대로 학대하는 삐뚤어진 자신을 보며 울부짖는 꿈을 대체 몇 번이나 꿨는지 세기조차 지쳤다. 그 때의 자신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차라리 다른 선택받은 아이들이 자신의 얼굴에 대고 욕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다.

 

 만약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주아주 옛날이 좋았다. 천재가 아닌 채로 중학교에 입학하여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하던 때보다 전으로, 다이스케와 죠그레스를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때보다 전으로, 디지몬 카이져가 되어 디지몬들을 그저 게임의 몬스터정도로만 생각하며 학대하던 시절보다 전으로. 이왕이면 형이 사고를 당하기 전으로 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자신은 형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형은 아직 살아있을 것이고, 자신이 카이져가 될 일은 없을 것이고, 디지바이스를 가지고 있었으니 웜몬과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건 아니야. 물론 디지몬 카이져가 되었을 때의 일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지만, 그래도 덕분에 다이스케들과도 만났고 웜몬과 다시 만나면서 눈물도 흘릴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타락했던 자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 있어주었던 웜몬과의 기억을 굳이 리셋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형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대로도 좋은 것이다.

 

 

“ …그냥 생각이 난다는 거지. 과거의 영광이 그리울 때가 있기도 한 거야.”

 

 

 웜몬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켄은 그를 끌어안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렸을 때의 자신에게는 웜몬이 약간 커서, 안고 다니기에는 살짝 벅찬 느낌이 없잖아 있었것만 이제는 끌어안아도 공간이 조금 남았다. 술기운으로 열기가 오르는 몸에 시원한 웜몬의 피부가 닿으니 기분이 좋았다.

 

 난 켄과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좋아. 자신이 대답하기를 곤란해 한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웜몬이 말을 살짝 돌렸다. 웜몬은 굳이 자신이 하고 싶지 않아하는 말이나 곤란해 하는 말에 집착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다이스케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도 어른스럽게 위로하며 기다려준 것도 웜몬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 어른스럽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 나도 웜몬이 좋아.”

 

 

 오늘은 걸어서 집에 갈까? 정신도 차릴 겸. 안겨있는 웜몬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져서 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숨을 쉴 때마다 나는 알코올 냄새가 밤공기에 섞여 들어갔다.

 

 오늘은 집에 가면, 어쩐지 형의 사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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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선택받은 아이들] 이라는 주제의 디지몬 합작에 이치죠우지 켄으로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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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리쿠
2013. 11. 25. 18:27

- 키스하는 부위로 n제(13. 팔)






 싸늘한 기운이 물씬 느껴져오는 저녁이었다. 날이 지나감에 따라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가 차가워지는 것이 확실히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티셔츠의 옷깃 사이로 바람이 파고들어 켄은 소름이 돋은 팔을 몇 번 문질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시끄러웠던 경기장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감에 따라 조용했다. 낡은 운동화와 풀이 마찰하는 소리, 거칠어지는 선수들의 숨소리, 날아가는 공의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관중들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켄은 경기가 끝난 경기장에 다시 돌아와 여운을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이 뛰어다니던 필드와, 아무도 없을 때 보는 필드는 색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서있던 관중석에서 천천히 내려와 켄은 필드의 중앙에 섰다. 넓게 트여진 야외의 경기장에서, 방금 전의 경기가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공을 쫓던 선수들과 발 끝으로 닿던 공의 느낌, 하늘로 솟구치는 공과 상대편을 피해 드리블하던 아찔한 느낌.


" 켄!"


 하고, 한창 여운을 즐기던 켄을 가로막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켄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이스케…? 자신의 눈이 꼴사납게 동그랗게 뜨여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소리는 조용한 필드를 메꾸다 이내 자신에게 다가온 이, 다이스케를 향해 다다른 듯 했다. 처음만났을 때 보다는 약간 성숙해진 얼굴로, 여전히 장난끼 가득하게 웃어보인 다이스케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다이스케를 보며 켄은 키가 더 컸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창 성장기일 나이기도 하고, 서로 바쁜 데다가 집도 떨어져 있어서 자주 만나지 못하니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중학생. 선택받은 아이들의 모험이 끝나고도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우리들의 특별한 1년은 지나갔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놀고있는 웜몬을 볼 때마다 자신의 지난 1년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고, 너무나도 특별했기 때문에 그 때의 선택받은 아이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있었다. 날짜를 일부러 정해서 만나기도 했고, 생일이면 서로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래도 전에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디지몬 세계로 찾아가고, 싸우던 나날들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컸지만 자유로운 초등학생 때와는 다르게 나이가 먹으면서 할 일이 늘어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싸움에 타이치 씨와 같은 선배-어떤 의미로든-들이 제대로 관여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였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이제 와서 또 다시 디지몬 세계에 일이 생기고 다시금 선택받은 아이들이 나온다면, 자신이 과연 예전처럼 다시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자신은, 그리고 선택받은 아이들은 커가고 있는 것이었다.


" 오늘 경기 봤어. 대단한걸~ 천재 소년 안죽었다니까!"


 놀리지 마,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니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다이스케의 장난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하고 나서도 괜히 반가운 마음에 다이스케의 얼굴을 보며 슬쩍 웃자 다가와 자신의 손목을 잡는 것이었다. 싸늘한 피부에 닿아오는 따듯한 손바닥의 느낌이 좋았다. 다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도 똑같아. 그지? 다이스케의 눈은 자신의 상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제야 켄은 그가 왜 굳이 자신의 손목을 잡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한창 뛰다가, 상대 편의 선수와 부딛치는 바람에 넘어져서 팔에 상처가 생겼었다. 한창 물이 오른 때였기에 괜찮다며 넘겼지만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긁힌 팔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기에 그것을 발견한 감독님께서 치료를 해줬었다. 아마 이것이 걱정되었던 것이겠지. 아프지 않다고 말하며 켄이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고 하자 다이스케는 조용히 입술을 밴드의 위에 가져다대었다.


" 하여간 무리한다니까."


 밴드 너머로 느껴지는 시원한 느낌에 상처에서 올라오는 열이 식어갔다. 나보다 무리하는게 어디의 누구인데? 왜 여기까지 온거야. 당연히 경기 보러 왔지! 키득키득거리며 다이스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다이스케의 장난어린 웃는 얼굴은 켄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하여간 이 얼굴만 보면 심술궂게 되어버린다니까. 켄은 잡혔던 손목을 빼내어 그대로 다이스케의 볼을 잡고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짧게 맞추었다. 갑작스런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바보같은 표정. 뭐, 이것도 좋아하지만. 

 





Posted by 하리쿠
2013. 6. 7. 04:30

-오사무x디지몬 카이져=오사카이

 

 

 

 

 

 

 

 

 

' 이 세계에선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거야?'

 

 

 처음으로 키메라몬을 만들어 냈을 때 내 속의 누군가가 말했다. 데이터로 만들어진 이 세계에선 자신이 조금만 손을 대어도 새로운 것이 생겨났으며 데이터를 합쳐 생명마저 만들어 낼 수 있다.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세계, 그야 말로 꿈의 세계였다. 나는 황제니까 뭐든 만들어 내도 괜찮아. 주먹을 쥔 켄의 손이 작게 떨렸다. 데이터로 이루어진 디지몬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어쩌면 이 게임 안에서 데이터화 된 사람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든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꼭 살려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켄은 디지몬 세계 안에서의 자신이 좋았다. 현실세계에서의 자신은 뭔가가 가로막고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래에 있는, 자신보다 한참은 떨어지는 벌레같은 인간들에게 존댓말을 써야하고 그들을 받아주고 있는 자신과 가식적인 인간들을 보고 있자니 역겨움마저 올라왔다. 하지만 디지몬 세계에서의 자신은 달랐다. 현실 세계에서는 할 수 없던 행동도 할 수 있었고, 만들어 낼 수 없던 것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디지몬들은 자신만 바라보면 솔직하게 두려움에 벌벌 떨었고 이블링 하나면 그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 게다가 거울을 보면 있는 자신의 모습은 형의 그것과 같아서, 마치 형이 돌아온 것만 같았다. 천재같은 형. 그리고 형과 같은 자신. 켄이 디지몬 세계에 좀 더 정을 붙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마음에 꼭 드는 세계를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다. 켄은 그렇게 생각했다. 생명조차 만들어 낼 수 있는 세계라면 분명 형을 되살려 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머리모양도, 얼굴도, 심지어 체형까지 똑같이 재현하고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두뇌와 자신이 알고 있던 형의 성격을 넣는다면 분명 형과 동일한 인물이 만들어질것이고, 그렇다면 이 세계는 완벽해 지는 것이다.

 

 

형이라면, 황제의 자리를 줘도 괜찮아.

 

 

 

 

 

 

-

 

 

 

 

 

 

 켄은 그 날을 기점으로 디지몬 세계를 공격할때 외의 시간은 형을 만들어 내는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형의 외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디지몬 세계에서의 자신은 형과 꼭 닮았기에, 그것을 본따 만들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었다. 형은 죽지 않았어. 형의 데이터를 만들어내며 켄이 제일 먼저 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만들어 낼 수 있는 형이 죽었을리가 없어. 누군지 모르는 자가 보낸 메일이 형의 죽음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에 완벽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그 마지막 죄책감과 갈 곳을 잃어버린 켄의 부족한 애정을 채워주려는 자기방어라는 것은 아직 어린 켄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만을 말하자면 형을 되살리려는 행위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외형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것이 살아 움직인다고 해도 그것은 말을 하지 못했고, 말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으며,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이 건들지 않으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형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 생긴 것 같았다. 몇 번 째인지 모를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야 켄은 한계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형……."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던 '물체'가 두꺼운 안경 너머의 공허한 눈으로 켄을 응시해서, 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형이라고 부른 것은 절대로 형이 아니다. 형과 꼭 닮았지만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움직이는 물체에 불과했다. 으득, 하고 이를 악 문 켄이 그것을 향해 다가가 그것의 뺨에 손을 대었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는 분명 따듯했지만 체온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으로 미소를 짓는 체를 한 물체가 손을 들어 켄의 선글라스를 벗겨내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오롯이 그것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 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그것이 말했다.

 

죽여줘, 하고.

 

 

"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나는 사람이 아니야

 

 

" …내가 만들어 낸 거잖아. 마음대로 그런 소리 하지마!"

 

 

죽여줘

 

 

" …………."

 

 

죽여줘

 

 

 켄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온 세상의 지식을 집어 넣은 그것은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켄이 자신을 만들어낸 것도, 또한 이 곳이 데이터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 듯 했다. 분명 웜몬이 그것이 요즘 혼자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고 했다. 켄은 끌어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것에게 등을 돌렸다. 펄럭이는 망토소리가 자신 안의 무언가를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켄은 걸음을 재촉해 그것이 있는 방을 나왔다. 켄, 하고 여전히 듣기 싫은 호칭으로 부르는 웜몬이 울 것 같은 얼굴의 켄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 저거."

 

 

 형이 저렇게 나약한 소리를 할리가 없어. 저건 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형은 단순한 천재일 뿐인 존재가 아니야. 형을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해.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 저건 형이 아니야. …아니야.

 

 

" 없애버려."

 

 

 

 

 

 

 

 

' 오사무 형은 죽었어.'

 

 텅 빈 그것의 방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안의 누군가가 말했다.

 

 

 켄이 눈에 띄게 어둠의 힘에 약해진 것은 그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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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왕을 보다가 문득 켄과 카이져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인격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켄이 형에 대한 애정과 그에 따른 절망감, 그리고 열등감만 뭉처서 버려버린 것이 디지몬 카이져가 되어서 나타난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소설입니다.

오사무x켄은 참 좋아하는 구도인데요, 켄에서 카이져로 살짝 바꿔봤습니다. 안에서 호칭을 조금 고민했는데 역시 그냥 켄이 나을 것 같아요. 카이져도 켄의 한 부분이니까요.

여기서의 누군가는 켄입니다. 켄이 성장하기 위해서 다이스케가 필요했다면 카이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앞으로도 종종 이 소재는 써먹고싶어요. 카이져를 다른 인격으로 분리해놓고 나니 디지몬 카이져의 고독이라던가, 그런 것에 신경이 좀 쓰이면서 카이져에 대한 애정이 생겨나고 있어서요. 불쌍한 아이라는 느낌이 강한 카이져를 좀 더 예뻐해주고싶은 그런?^ㅅ^

 

 

 

(머래는거야)

Posted by 하리쿠
2013. 4. 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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