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17. 01:54

" 시즈 ?"

하고 공기중에 가볍게 울려퍼지는 소리가 조용한 공원안을 가득 메웠지만, 그 말을 듣는 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가 그 소리를 들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가볍고, 어떻게 들으면 상큼한, 그리고 미성의, 그러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이는 그 목소리 만큼이나 미형의 얼굴을 하고있었다. 결좋은 검정색 머리카락을 멋낸듯한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가볍게 손질하놓은 머리모양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미청년, 신주쿠의 정보상 오리하라 이자야.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가 모처럼 자신이 부른 이에게 궁금증을 띄우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꽤나 부드러워보이는, 이자야 만큼이나 얇은 머리칼을 - 금발이라 더 얇아보이는것인지는 모르겠으나 - 늘어뜨리고 있는 남자. 머리카락만 묘사를 해놓은 것은, 그만큼 푹 숙여진 머리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얼굴이 머리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체를 알 수 없는것은 아니었다. 이케부쿠로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바텐더차림의, 저런 금발을 하고 있는 남자가 또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렇기에 이자야가 벤치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에 바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자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공원을 빠져나가려던 발걸음의 방향을 그에게로 바꾸었다. 조용한 공원에서는 몇몇 새들이 자그마하게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자야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을 무렵에는 그것을 대신하듯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새근새근, 하고.

" 시- 즈."

자그마하게 그를 불렀지만, 역시 그는 자고있었다. 태양이 깊게 비추고있는 대낮의 공원. 비록 나무가 그늘의 역활을 하고있어 모든 빛이 그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뭇잎사이로 실같이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빛에 유난히도 그의 머리칼이 금빛으로 반짝였고, 그것을 보고있자니 이자야는 묘하게 눈이부셔, 그대로 살짝 주저앉아 그의 얼굴을 살피었다. 위에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평소와는 다르게 곱게 펴진 미간과 튀어올라와 있지 않은 핏줄이 눈에 띄었다. 자주 그의 얼굴을 보기위해 이케부쿠로에 왔지만, 이렇게 편안해보이는 시즈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기에, 이자야는 신기한것을 보는듯한 눈으로 계속 그의 얼굴을 살피었다.

항상 쓰고있던 선글라스는 벗어두었는지 아무런 장애물 없이 보이는 살짝 감겨있는 눈과 얇게 뻗어있는 긴 속눈썹, 오똑한 콧날과 앙다문 입술까지. 이토록 평안한 얼굴을 보고 누가 그를 이케부쿠로 최강 사나이라고 생각할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곱게 펴진 미간 사이가, 물론 항상 쓰고있는 인상으로 인해 조금의 파임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밋밋한 형태를 띄고있어서, 이자야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곳을 건들였다. 살짝 손이 닿은 미간사이는 손가락끝이었지만 느껴질정도로 따듯했고, 그것이 햇빛의 영향인지 시즈오의 체온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이자야의 손끝에 따스하게 데워진 공기의 느낌이 미미하게 다가와서, 그 따스한 느낌에 이자야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좌악, 펴고 시즈오의 얼굴 앞에 들이대었다.

손바닥으로 말끔히 가려지는 얼굴. 그리고, 벌어진 손가락 사이사이로 보여지는 얼굴의 파편. 원래, 멀쩡하게 보이는 것보다 드문드문 보이는것이 더욱더 눈길을 끄는것이 인간의 본성이므로, 그 손가락 사이의 형상들이 이자야의 눈에 박혀들었다. 정말로, 평소보다 얌전하고, 평안하고, 조금 강아지같기도 해서 귀엽다는 생각도 들고, 아니, 물론 인간은 모두 귀엽지만 시즈오는 인간이 아니고, 뭐랄까, 보면 볼수록 가슴속에서 무언가 형용할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것 같아서, 그러니까, 뭐였더라.

─────이걸, 뭐라고 표현하더라. ... 그러니까,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공기는 따스했다. 옅게 색색거리는 숨이 닿아오는 손바닥은 간지러웠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바람에 살랑이는 금발은 부드러웠다. 곱게 감긴 속눈썹은 가지런했다. 손바닥에 가려진, 아마 귀여울듯한 동그란 콧망울과 곧은 콧대가 잘 어울렸다. 그러니까 이건, 그거다.

이자야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손바닥을 내렸다. 이자야의 눈동자 안에 가득하던 시즈오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사실상, 가만히 자고있는 시즈오에게 다가가고 있는것은 이자야였지만, 아무튼. 이자야가 시즈오의 앞에 쪼그려 앉음으로써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는, 조금 더 좁혀지고 있었고, 이자야는 마치 비디오를 슬로우모션으로 돌리듯 천천히 시즈오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정말, 지금 분명 자신의 앞에있는 인물은 시즈오였지만, 무언가, 시즈오 같지 않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자신의 시즈오를 향한 감정이 평소같지 않다고 해야하나. 이건 다, 괜히 자고있는 시즈의 탓이야, 하고 괜한 변명거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자야는 움직이는 자신의 몸을 애써 저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거리는 좁혀지고 좁혀지고 가까워져서, 마침내 아까 손바닥으로 느꼈던 따스한 공기의 느낌이 자신의 안면 가득히 느껴졌고, 시즈오의 숨결이 자신의 피부에 와닿아서, 이자야는 그제서야 자신이 미쳤구나,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기에는 안쪽에서 저릿하게 퍼지는 몰랑거리는 감정이 쿡쿡 찔러와서, 이건 다 시즈때문이야, 하며 이자야는 조금 고개를 틀었다. 자그마하게 벌어진 시즈오의 입술사이로 옅게 드나드는 숨이 이자야의 입술사이로 살며시 전해져왔다. 그와 동시에 이자야도 조금 입을 열었고, 두 숨이 교환되며 두 입사이로 왕래하는것이, 분명 두 사람의 입은 닿지조차 않았음에도 아주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것마냥 야릇했다. 이자야는, 잠시 그것을 느긋하게 즐기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피부에만 느껴지는 사람의 체온이, 입술에서도 따스하게 느껴지겠지, 하며.

" ......... 음, "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자야가 시즈오의 체온을 가득 느끼고있었던것처럼, 이자야의 체온으로 뎁혀진 공기가 거슬렸던건지, 아니 둘 사이에 끼어있어 그 공기는 더욱 더 가열되었을터이지만, 아무튼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인기척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잠꼬대인지, 시즈오의 입술 사이에서 나즈막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에 깜짝 놀라버린 이자야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시즈오의 앞에서 떨어뜨렸다. 그렇게 벌떡 일어난 이자야가, 잠시 시즈오에게 닿을뻔 했던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나, 도대체 무슨짓을 한거지, 하며. 한순간에, 몸속의 모든 피가 얼굴을 향해 몰린것같이 뇌속에 디잉- 하고 울렸다. 아마, 그것때문에 자신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있을듯 했다. 그 증거로, 머릿속은 엉망징창이었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마치 불속에 다이빙이라도 한듯이, 온 몸이 후끈거려 이자야는 도저히 이 열기를 견뎌낼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민망하고 이상한거람. 물론, 그 이유는 알고있지만.

이자야는 잠시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정말, 공원에 사람이 없다는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자고있는 남자에게 키스따위나 하려하는 남자의 모습을 누가 곱게 봐줄것인가. 물론, 곱게 봐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극소수였으므로 가볍게 넘기었다. 아무튼, 정말 자신은 무슨행동을 하고 있는건지. 이자야는 자신은 이렇게 복잡한 감정으로 자신의 행동조차 통제를 못하고있는데, 아무것도 모른채 여전히 잘도 자고있는 시즈오에 갑자기 심통이 났다. 심통, 이라고 하니까 마치 초등학생 아이같은 표현이었지만, 이자야의 속에 있는 감정은 정말, 그것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물론, 이자야는 초등학생이 아니었지만.

" .............정말 싫다구."

.

.

.

" 오... ......시즈오 !??"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서, 여전히 잘도 자고있던 시즈오가 닫혀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자신의 어깨를 쥐어흔드는 자신의 선배- 톰을 바라보았다. 화를 잘내는 다혈질이었지만, 그와 맞지않게 약간의 저혈압인 시즈오는 일어나자마자 평소와 마찬가지로 진하게 느껴지는 두통에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왜 톰이 자신을 저렇게 자급하게 부르는지에 대해 의문을 담아 톰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수금을 하러간 어느 아파트. 그 전 수금자에게 조금의(?) 난리를 친 탓인지 톰은 시즈오에게 먼저 공원에 가있으라고, 자신이 수금해서 가겠노라고, 그렇게 말했고, 시즈오는 조용히 동의하며 얌전히 그 말을 따라 공원에 앉아있다, 그렇게 잠든것 같았다. 그런데, 저렇게 다급하게 부를만한 사정이 무언가 있던가 ?

그러고보니, 조금 이상한것이 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새파랬고, 태양은 밝았으며 세상은 여름을 향해 가고있었으므로 조금은 따듯했다. 그러나, 자신의 피부는 약간의 싸늘함을 호소하고있었다. 또한, 톰이 쥐고있는 어깨또한, 무언가 허전했다. 이것은,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단숨에 눈치를 챌만한 현상이었지만, 시즈오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둔했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눈치를 채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반쯤 꿈속을 헤메고 있는 시즈오를 깨우던 톰이, 그 이유를 말해주고 나서야, 시즈오는 알 수 있었다. 왜 자신들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시즈오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것인지에 대해.

" 시즈오 ! 너 셔츠, 셔츠 어디갔어 !??"

하고, 톰이 소리치고 나서야, 시즈오는 자신이 아까까지만해도 입고있었던 셔츠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셔츠'가 사라졌다. 그 위에 입고있던 조끼는 아무일도 없었다는양 멀쩡히 입혀져있었것만, 셔츠만 홀연히. 시즈오는, 그제서야 왜 피부가 조금이나마 싸늘했는지, 어깨위에 놓인 톰의 손이 가까웠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저리도 이상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맨몸위에 조끼만 입고있었음으로, 그런것이었다. 시즈오는 깜짝놀라 자신의 상반신을 살피었고, 전혀 아픔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몰랐지만, 자신의 오른쪽 팔에 길게 그어진 상처를 발견했다. 물론, 그것은 시즈오의 튼튼한 육체로 인해 심하게 파여있지는 않았지만, 시즈오가 자고있던 탓에 조금의 힘도 주고있지 않았음으로 그나마, 평소보다 더 아가리를 열고있었고, 그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피는, 이미 마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하나, 시즈오가 자신을 살피며 알 수있던 것.

자신의 옆에, 눈을 찌르는 빛의 무언가가 꽂혀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여기 이런 평화로운 곳에 있을리가 없는, 은빛 나이프였다.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에게 익숙한 그것. 시즈오는 단숨에 알아챘다. 저것은 자신이 전에 입으로 부순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저것을 자신에게 던졌던 사람, 즉 저것의 주인이 오리하라 이자야 라는것을. 그리고, 그 칼날에 박혀있는 이리저리 찢긴 천쪼가리들이 자신의 셔츠의 잔해라는것을.

" ..........이..... 자야..... 이자식.........!!!!"

시즈오는 그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손으로 그 나이프를 꽉쥐어 깨트렸고, 소리쳤고,. 톰이 말릴새도 없이 그저 조끼차림으로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리고, 그의 목적지는 다들 알 그곳. 신주쿠의 정보상, 나이프를 아주 잘 다루는, 시즈오의 셔츠를 갈기갈기 찢어 조끼차림으로 만든 범인, 그리고 자신이 했다는 사실을 일부로 그에게 알리기 위해 팔을 긋고, 나이프까지 남겨둔, 오리하라 이자야의 아파트.

-fin

 

Posted by 하리쿠